땅으로부터 읽어낸 시간

마포 문화비축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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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 성산동

마포는 예로부터 한강의 대표적인 나루터이자 전국 농수산물의 집산지로 유명하였으나 하운의 쇠퇴와 함께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마포를 중심으로 하는 강북 서부지역은 일찍이 시가지화되었으며, 강변북로가 개통된 이후로는 대규모 주택단지로 탈바꿈하였다. 요즘에는 개인적으로 마포라 하면 합정, 상수, 망원동, 연남동과 같이 유행을 선도하는 동네가 모여 있는 일종의 ‘문화특별지구’란 이미지가 연상된다.

어느 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우연히 문화비축기지를 홍보하는 광고를 보았다. ‘문화를 비축한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 신선했다. 호기심에 핸드폰을 꺼내 문화비축기지를 검색해 보니 소재지가 마포구 성산동으로 나왔다. 성산동, 20년 넘게 서울에 살면서도 처음 들어보는 동네였다. 성산동은 동쪽으로는 서교동과 연남동, 서쪽으로는 상암동, 남쪽으로 망원동, 북쪽으로 남가좌동과 접한다. 마을 부근의 산이 성처럼 둘러있어 우리말로 성메, 성미라고 불러왔으나 행정적인 지명을 정하는 과정에서 한자음을 차음하여 ‘성산동’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석유비축기지에서 문화비축기지로

성산동의 가장자리에 있는 매봉산 자락에는 경제 개발 시대의 산업유산이라 할 수 있는 ‘석유비축기지’가 있었다. 석유비축기지는 1973년 1차 석유파동 이후 서울시에서 1976~78년에 걸쳐 건설한 민수용 유류 저장 시설이며 지름 15~38m, 높이 15m에 이르는 5개의 탱크로 구성되었다. 탱크 안에 비축되는 석유의 양은 서울 시민의 한 달 사용량과 맞먹을 정도의 규모였다고 하며, 1급 보안 시설로 분류되어 시민들의 접근과 이용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이후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를 위해 서울월드컵경기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인근에 있던 석유비축기지는 위험 시설로 분류되었다. 그에 따라 정부와 서울시에서는 탱크에 저장된 석유를 이송한 뒤 2000년 12월부로 시설을 폐쇄하였다. 시민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폐산업 시설인 석유비축기지의 향후 활용 방안을 두고 고민하던 서울시는 문화공간 조성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13년 개최된 석유비축기지 활용 아이디어 공모전에는 많은 시민이 참여했고, 이후 국제 현상 공모 당선작을 바탕으로 하여 친환경 복합문화공간이 조성되었다. 그 결과 5개 탱크는 공연장, 전시장 등으로 탈바꿈하였으며, 새롭게 신축한 1개 탱크는 커뮤니티 센터로, 임시 주차장이던 넓은 야외 공간은 문화마당으로 개방하여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문화비축기지

도착 직후 시선을 사로잡은 건 ‘문화비축기지’라는 글씨가 적힌 오브제였다. 오브제를 지나 꽤 긴 거리를 걸었지만, 계속 넓은 마당이 이어질 뿐 이렇다 할 근사한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넓은 마당 뒤로 돌산처럼 보이는 산만 두 눈 가득 들어왔을 뿐이다. 산 사이로는 몇 개의 건물이 보였는데 처음에는 능선 속에 볼품없이 파묻혀 있는 것 같은 모양새가 초라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열심히 발걸음을 옮겨 마당을 지나 오른쪽으로 크게 돌면 등장하는 ‘T5’ 관으로 들어가 보았다.



‘T5’는 ‘이야기관’으로 1970년대 석유비축기지가 만들어진 시기부터 문화비축기지로 새롭게 거듭나기까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동안 쌓아온 이야기들을 전시해놓은 곳이다. 일단 건물 외형이 녹슨 철판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건축물의 프레임 사이사이로 보이는 돌산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한 점 역시도 인상적이었다. 석유비축기지로 운영되던 당시 사용했던 서류, 작업복 등을 전시해놓았고, 구어체로 풀어둔 텍스트 덕분에 ‘이야기관’이라는 이름처럼 어르신에게 옛날얘기를 듣는 느낌이 들었다. 석유비축기지의 흔적을 살린 요소인지 모르겠지만, 전시 벽면 장식을 파이프 소재로 구성해놓은 것 역시도 매력적이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T4’는 주관적으로 판단하기에 문화비축기지 안에서 가장 큰 탱크처럼 느껴졌다. 이야기관에서 상영된 건축가 인터뷰 영상에 따르면 ‘T4’는 건축가의 설계상 전체 공간을 대표하는 건물이라고 한다. 특히 탱크 골조 특유의 공간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니 실내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T4’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15m 높이의 기존 탱크를 그대로 살려 만든 독특한 공간으로, 전시와 퍼포먼스, 워크숍 등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는 장소로 활용한다.




‘T3’은 5개 탱크 가운데 유일하게 석유비축기지로 활용되던 당시 유류 저장 탱크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탱크는 땅속 깊이 묻혀 있고 좁은 철제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아쉽게도 출입은 불가능하지만, 땅 위로 노출된 탱크의 상부 철제 다리와 외관 일부를 통해서 과거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다.


‘T6’은 ‘T1’과 ‘T2’를 해체하며 나온 철판을 재활용해 외부 벽면에 부착한 신축 건축물로, 운영 사무실, 창의 랩, 강의실, 회의실, 카페테리아 등 커뮤니티 활동을 위한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1층과 2층을 잇는 경사로는 전시, 아카이빙 공간으로 활용하는데, 취재차 방문했을 때는 실내 썰매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나무 소재 썰매에 색연필로 그림을 그려 자신만의 썰매를 만든 뒤 신나게 경사로를 내려갔다. 상층부에 있는 옥상정원은 보통의 옥상정원과 달리 삼면이 막혀 있으며, 뻥 뚫린 천장으로 하늘만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옥상정원이 휴식을 위한 공간이라면, T6의 옥상정원은 방문객을 명상에 잠기도록 하는 공간이었다.




‘T2’는 공연장으로 실내·실외 공간 모두에서 공연을 즐길 수 있다. ‘T2’ 입구에서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면 탱크 상부에 이르는데 매봉산이 둥그렇게 두르고 있어 마치 원형극장을 연상케 한다. 원형의 탱크, 녹슨 강판과 노출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외관, 건물 사이사이로 보이는 돌산까지. 그 모습을 본 친구는 이곳에서 로마 유적지 느낌이 난다고 했다. 일반적인 공연장과는 달리 산에 둘러싸여 있고, 무대와 좌석 모두 돌로 꾸민 모습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지막으로 ‘T1’은 석유비축기지 시절 휘발유를 보관했던 가장 작은 탱크로, 현재는 전시, 워크숍 등을 위한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된다. 내부 벽면과 천장을 유리로 만들어 밤에는 별을 관찰할 수 있는 낭만적인 공간이다. ‘봄을 기다리는 소나타’라는 체험전시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산봉우리 사면을 유리로 감싼 공간이 나왔고, 어린아이들이 형형색색 피아노에 앉아 악보를 보며 나름의 연주를 하고 있었다. 유리 벽을 통해 보이는 매봉산 암벽과 식물, 피아노 소리, 스피커에서 들리는 새소리까지, 그 모든 감각이 나를 숲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야말로 문화비축기지 공간 특성을 적절히 고려한 이벤트라 할 수 있겠다.



여섯 개의 탱크를 모두 둘러본 뒤에는 다시 마당으로 내려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넓은 부지 위로 조성된 건축물임에 불구하고 ‘T6’의 카페테리아 외에는 식음료를 판매하는 곳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주변에 이렇다 할 식당가가 조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합정역이나 상수역으로 자리를 옮겨 끼니를 해결해야만 했다.




땅으로부터 읽어낸 시간 – 재생건축

땅으로부터 읽어낸 시간. 문화비축기지 공모전 당선작의 이름이다. 재생건축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대한민국 재생건축의 대표주자로 급부상한 ‘마포 문화비축기지’ 외에도 서울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재생 건축물이 적지 않다. 정수장이었던 ‘선유도 공원’, 공단의 한 창고였던 성수동 ‘대림창고’, 대중목욕탕이었던 ‘젠틀몬스터 배스 하우스’가 그 예이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문화비축기지 외에도 다양한 재생 건축물을 방문해 단순히 차를 마시거나, 산책을 즐긴다. 그러나 공간에서 느껴지는 시간과 맥락을 읽어내며 과거와 현재의 연결점을 더듬어본다면 공간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줄 것이다.




서울시청 푸른도시국 (http://parks.seoul.go.kr/)

주소: 서울 마포구 증산로 87
휴무정보: 연중무휴(공원) / 월요일 휴관(전시관)
운영시간: 24시간
시설별 이용시간은 프로그램에 따라 상이함
프로그램 참여는 개별신청 필요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