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동네 아는강원 1》 미리보기 #4

속초: City of Books

이지현|

최근 속초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자연스럽게 ‘책’이 화두로 떠오른다. 지역 서점은 여행지에서 반드시 방문해야 할 명소로 거듭났고, 여행객은 책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숙소에서의 하룻밤을 기꺼이 택한다. 책과 속초,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단어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고자 직접 그곳으로 향했다. ‘실향민의 도시’라는 옛이야기를 품은 채, 수산업이 흥성했던 시절과 닭강정이 관광객의 유일한 관심거리였던 시절을 넘어, 지금 속초는 지역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있다.


지역 서점,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다 

속초에 도착했음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건 설악산 능선이다. 여기에 영랑호와 청초호라는 두 개의 큰 호수, 그 옆을 든든하게 받치는 동해까지. 세 가지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풍경은 이 지역을 대표할 만한 매력 요소다. 낮은 인구 밀도에 따른 한적한 분위기가 도시 생활에 지친 여행객을 말없이 위로하지만, 이는 이곳에서의 즐길 거리가 꽤 단조롭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구 8만여 명의 소도시를 먹여 살리는 건 사실상 동해와 설악산 일대에서 발생하는 관광 수입이다. 한국전쟁 이후 고향으로 빨리 돌아가려던 함경도 출신 실향민이 모여 살며 형성된 아바이마을, 한때 활발했던 수산업과 조선업으로 삶을 일군 부모 세대 이야기는 낡은 유산으로 여겨진 지 오래다. 그동안 대다수 관광객의 관심사는 닭강정, 물회 등 몇 가지 먹거리에 그치곤 했다.




上 2015년에 리모델링을 마친 동아서점 내부는 햇볕이 잘 들어 환하다

下 동아서점은 세심한 책 큐레이션으로 호평받고 있다


이 지역을 일반적인 관광 도시라 생각했던 이들이 ‘속초에는 바다와 산과 호수 그리고 닭강정 외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인식한 계기는 뜻밖에도 오래된 지역 서점이었다. 1956년에 개점한 ‘동아서점’이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김영건 매니저가 아버지 김일수 대표의 권유로 가게 운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이후부터다. 한때 폐업을 고민했던 오래된 서점은 4년 전 김 매니저가 단행한 대대적인 리뉴얼 이후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냈다. 내・외관을 깔끔하게 재단장했고, 도매상에서 배본하는 대로 받아서 진열하기보다 서점에 들여올 책을 직접 선별해 주문하기 시작했다. 지역 종합서점의 본분에 충실하면서도 독립서점다운 개성과 대형서점에 버금가는 다양한 콘텐츠를 갖추기까지, 64년 역사의 서점에 일어난 변화는 많은 이의 주목을 끌었다.

3대째 운영 중인 동아서점은 지역민은 물론이고 타 지역에서도 일부러 찾아올 만큼 사랑받고 있다. 속초에서 유독 서점이 주목받게 된 이유에 대해 김 매니저는 “여느 소도시라면 으레 갖는 고민이겠지만, 그만큼 갈 만한 곳이 없으니 서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라 설명한다. 이처럼 현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그이지만, 속초와 연계해 책이나 서점을 떠올리는 일이 서서히 늘어난다면 앞으로 이 문화가 지역 정체성으로 거듭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물론 “국내 책 유통 구조나 오프라인 서점의 열악한 운영 문제가 해결됐을 때 가능한 이야기”라 말하는 신중함 역시 잃지 않는다. 여기에 덧붙여 김 매니저는 동아서점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2017년 『당신에게 말을 건다: 속초 동아서점 이야기』를 냈다. 그때 땡스북스(THANKS BOOKS) 이기섭 대표님께서 ‘속초는 책으로 유명해질 것 같다’는 내용의 추천사를 써주셨다. 감사했지만 솔직히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실이 된 것이다. 앞으로도 사람들이 꾸준히 속초에 찾아와 서점을 즐기려면 각 서점의 지역색이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 동아서점도 계속 다양한 시도를 해나갈 예정이다.”



완벽한 날들의 1층 서점은 가장 먼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다


책과 함께 머무는 하룻밤, 북스테이

속초가 관광 도시로 급성장하는 동안 지역에는 수많은 숙박시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2017년에 문을 연 ‘완벽한 날들’은 단연 돋보이는 공간이다. 1층은 서점 겸 카페, 2층은 게스트하우스인 이곳은 책과 숙박을 결합한 북스테이로 운영 중이다. 서점의 이름은 메리 올리버(Mary Oliver)의 산문집 『완벽한 날들』에서 따왔다. 작고 다소 낙후된 인상의 속초시외버스터미널 뒤쪽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흰 외관의 2층 건물이 눈에 띈다. 완벽한 날들의 간판을 발견하는 순간, 이곳에서 보낼 하루가 조금은 특별하리라는 기대가 생긴다.

터미널 뒤편의 낡은 여관이 모인 골목은 일반적으로 서점이 있을 법한 동네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던 동네였지만, 건물 구조와 독특한 골목 풍경에 재미를 느낀 최윤복 대표는 주변의 만류에도 이곳에 책을 테마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원래 건재상이었던 건물은 이제 책으로 빼곡히 채워진 채 손님을 반긴다. 최 대표는 대형서점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기 어려운 신인 작가의 책이나 소규모 출판사의 책 위주로 서가를 채우는, 나름의 큐레이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완벽한 날들이 운영을 시작한 뒤로 후미진 골목에는 책을 찾는 손님들이 부지런히 오간다.



북스테이로 운영 중인 완벽한 날들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없이 매력적인 장소다


과거에 가정집이었던 2층은 개인실, 2인실, 도미토리로 이뤄진 아늑한 숙소로 탈바꿈했다. 조식을 먹을 때 사용하는 거실 테이블은 책꽂이를 겸하기 때문에 누구든 언제나 편히 책을 꺼내 읽을 수 있다. 저마다의 여행을 즐긴 숙박객은 저녁나절 이 커다란 테이블에 오손도손 모여 앉는다. 물론 강제는 아니다. 그러나 숙박객 대부분이 책을 곁들인 여행을 즐기고 싶어 이 숙소를 찾았기에 자리는 금세 채워진다. 같은 취향과 감성을 공유하는 이들은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이에게 기꺼이 옆자리를 내어주고 함께 책 읽기를 택한다.

산, 바다, 호수를 한데 품은 이 지역 특유의 평온한 인상은 독서라는 행위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낸다. 실제로 이 공간을 찾는 손님 대다수는 도시의 바쁜 일상을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잠시 쉬며 여유롭게 책도 보고 차 한잔도 즐기고 싶은 이들이다. 서점 공간을 활용해 북토크나 낭독회, 독서 모임 등 책과 관련된 문화 행사도 꾸준히 연다. 최 대표는 “서점 혹은 숙소로서 단순히 돈을 벌기만 하는 게 아니라, 문화공간의 역할을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책을 매개로 교류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휴식을 즐긴다. 그야말로 속초에서 보내는 완벽한 날들이지 아니한가.



문우당서림의 상징이 된 벽면 서가


그렇게 책의 도시가 된다

“책과 사람의 공간”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문우당서림’은 현재 속초에서 주목받는 또 하나의 서점이다. ‘아버지’ 이민호 대표가 1984년부터 운영하던 서점에 ‘딸’ 이해인 디렉터가 2017년부터 합류하며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디자인을 전공한 이 디렉터의 섬세한 감각과 손길이 공간 곳곳에서 느껴진다. 특히 238권의 책에서 발췌한 문장을 모아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 벽면을 채웠는데, 아름다운 문장으로 빼곡한 서가는 이곳의 시그니처 공간이 되었다. 평균 20년 넘게 동고동락한 직원들의 전문성과 친절함도 문우당서림의 자랑이다. 몇 년 전 개업 30년을 맞아 서점을 옮기면서 규모를 대폭 확장했고, 대형서점 못지않게 넓은 250여 평 공간을 운영하게 되었다. 다양한 연령대의 속초 시민이 가족과 함께 찾을 만한 문화공간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긴 행보였다. 오래전 아버지가 품었던 뜻은 오늘날 딸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지역 내 문화공간의 역할을 이어 가려는 문우당서림의 노력은 현재 진행형이다.



문우당서림의 외관은 지역 서점으로서는 드물게 큰 규모와 세련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문우당서림과 동아서점은 도보 1분 거리로 가까워 방문객의 동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여기에 완벽한 날들까지 더해 ‘속초 서점 투어’를 하는 이들이 증가하는 추세다. 이 디렉터는 “서울에서의 삶을 겪고 고향에 돌아와 보니 속초의 매력이 더욱 잘 느껴진다”고 말한다. “도시 규모가 작아 관광지가 모여 있고, 차를 타고 오든 뚜벅이 여행을 하든 짧은 시간 안에 지역을 돌아보기 좋다. 동선도 다양하게 만들 수 있다”고 지역의 장점을 설명한다.



지역을 차분히 변화시키는 이들이 있기에 속초의 내일이 기대된다


한편 칠성조선소 최윤성 대표는 할아버지 때부터 65년 동안 배를 수리하고 만들었던 조선소를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해석해 운영한다. 그는 동아서점과 완벽한 날들을 포함한 네 팀의 소상공인과 함께 극동연합을 꾸려 활동 중이다. 더 많은 이가 속초에서의 행복한 삶을 느끼고, 이곳에 터를 잡으며, 도시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기를 기대하면서 만든 모임이다. 최근 칠성조선소와 동아서점은 지역의 오래된 배 목수 이야기를 담은 사진 에세이 『나는 속초의 배 목수입니다』를 협업해 출간했다. 책이라는 매체에 지역성을 담아보자는 취지다. 속초의 다채로운 콘텐츠를 담아낸 책을 통해 사람들은 이 지역을 더욱 궁금해하고 있다.

타지 생활을 마무리 짓고 고향으로 되돌아온 속초의 2~3세대는 이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 중이다. 그 고민은 그들이 운영하는 가게를 한 단계 성장시키고, 더 나아가 지역을 변화시키고 있다. 누군가는 지금 속초를 ‘한국의 포틀랜드’라 부른다. 바다와 산을 곁에 둔 미국의 소박한 도시 포틀랜드, 그곳이 지닌 뚜렷한 지역색과 차분한 속도로 도시를 변화시키는 로컬 크리에이터의 모습에서 오늘날 속초와 닮은 점을 찾아낸 것이 아닐까. 천혜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책을 기반으로 한 지역 문화가 더욱 깊이 뿌리내릴 때, 속초는 머나먼 포틀랜드 못지 않게 아름답고도 단단한 문화를 갖춘 도시로 거듭날 것이다.


※ 본 콘텐츠는 《아는동네 아는강원 1》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

에디터

* 편집자: 아는동네

이지현

삶을 음미하며 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