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찻잎을 거두기까지

올티스

조혜원|

올티스를 찾은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찾아갔던 카페가 문을 닫아 차를 돌리려고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는 작은 녹차밭 안내 팻말이 있었다.



녹차 음료나 아이스크림같이 소소한 먹거리 정도를 파는 곳이겠거니 생각하며 안내판을 따라가다가 깜짝 놀랐다. 좁은 나무 사이로 걷던 중 갑자기 탁 트인 하늘 아래 넓게 펼쳐진 녹차밭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입구나 매표소도 보이지 않고 "ORTEAS"라는 글자만이 단정한 녹차 밭 앞에 서 있다. 오전에 비가 온 덕에 물방울을 매단 찻잎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열을 맞춰 소실점을 향해 뻗은 녹차 밭과 거문오름 사이에는 구름이 낮게 깔려있어 신비로운 분위기도 감돌았다.



밭을 따라 걸으니 다리 옆에 차가운 물방울이 스친다. 끝나는가 싶더니 왼쪽으로 더욱 넓은 차밭이 모습을 드러낸다. 제주의 많은 농지가 그렇듯 차밭 한가운데 돌담을 쌓은 무덤이 몇몇 보인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을 따라 내려가면 또다시 넓은 차밭이 펼쳐지고, 빨간 지붕 건물이 수채화처럼 놓여있다.



주차를 한 곳에서 왼쪽으로 내려오면 바로 나왔을 건물인데, 녹차밭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차밭을 크게 한 바퀴 돌아 도착했다. 갤러리처럼 조용하고 단정한 이곳은 녹차 시음장이다.


"차 드릴까요?"



천천히 찻잎을 계량하고 물을 끓여 티포트로 옮긴다. 조용한 공간에 물 따르는 소리가 울리니 신경이 집중된다. 나무젓가락만 한 묘목이 두 개의 가지로 갈라지고 그 가지가 또 네 개의 가지로 뻗어 찻잎을 수확할 수 있을 만큼 자랄 때까지, 무려 10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돌본 찻잎을 작년부터 수확하기 시작했다.



"녹차는 일 년에 네 번 수확할 수 있는데 첫 번째로 딴 잎을 세작이라고 해요.

제일 고급으로 치죠. 지금 드시는 게 바로 세작입니다."


그저 좋다고만 생각했던 차의 향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10년을 돌보다가 처음 수확했을 때 그 감정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처음으로 부모에게 "엄마, 아빠"라고 입을 뗐을 때, 혹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갖게 되는 미묘한 감정에 비교할 수 있으려나? 어떤 것도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떠올릴만한 것이 없다.



"지금도 수확할 때마다 처음 수확할 때 그 느낌이 떠올라요."


무려 2만 2천 평에 이르는 녹차밭을 오롯이 부부 둘이 힘을 모아 관리한다. 처음부터 둘이서 작업하기 수월하도록 재배 기계를 작동할 수 있는 폭으로 차밭의 간격을 맞췄다. 거문오름 아래 자리 잡은 차밭이라는 의미를 담아 오름을 상징하는 검은색 배경에 세작, 홍차를 그림으로 그려 넣어 패키지도 만들었다. 언뜻 보아도 전문적인 심미안이 반영된 모양새다.



"녹차 패키지는 대학원 다니는 우리 딸이 디자인한 거예요."


거문오름의 품속에서 자란 녹차는 이 가족의 어린 막내인 셈이다. 부모의 정성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나서는 큰언니의 손길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기특하게도 훤칠하게 자라난 자식을 바라보듯, 녹차밭을 돌아보는 부부의 표정에서 애정이 듬뿍 느껴진다. 시음장에는 녹차밭 방향으로 통유리를 달아두어 시야를 확보하였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짙은 녹색으로 바뀌는 모습을 네 번 바라보고 나면 한해가 지난다. 가족은 사철 푸른 녹차밭 위로 풍경이 변하는 모습을 어느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하듯 음미한다.



"9월 말에서 10월쯤이 되면 세 번째 순이 올라와 여린 녹색으로 덮이고 아래는 하얀 녹차 꽃이 피어요.

거문오름을 배경으로 하얀빛을 흩뿌리는 녹차 밭은 정말 예뻐요."


그 순간, 나는 하얀 꽃 위로 연둣빛이 아른거리는 가을과 흰 눈이 덮여 눈부신 장관을 연출할 겨울을 그려볼 수 있었다. 따뜻한 차 한 잔과 잘 어울릴 그 풍경을 흐뭇하게 기대해본다.

에디터

* 편집자: 강필호, 박혜주

조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