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의 어떤 찻집
차茶와 시간의 균형을 맞추는 남자
든해는 젊은 남자가 운영하는 찻집이자 펜션이다. 천장이 높고 여백이 많은 한옥에서 그는 혼자 차를 만들고 차를 내린다. 신중하고 느린 그 손동작을 보고 있으면 한쪽으로 치우친 시간의 균형이 맞춰지는 기분이다. 차를 대하는 태도만으로 차의 맛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할까? 그것은 높이나 부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깊이의 이야기다.
본인 소개 부탁한다.
한옥아트스테이 ‘든해’의 대표 박성휘이다.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하고 이후에 유라시아 아트 컴퍼니Eurasia Art Company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음향악을 기반으로 악기 개발과 연구, 문화 예술 관련 활동을 하고 있다. 든해도 그 일환이다.
여러 장르의 음악 중에서 국악을 선택한 계기가 있나.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긴 했는데 실제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직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우연히 맞닿아지는 결과물이 있지 않나. 제 경우에는 사물놀이를 만드신 김덕수 선생님의 공연을 보고 음악을 시작하게 됐다. 그게 중학교 3학년 때 일인데, 예고에 진학하기엔 한참 늦은 시기였지만 너무 흠뻑 빠져서 그냥 무작정 달려버렸다.
든해가 생긴 지 이제 막 일 년 됐다. 어쩌다 찻집과 숙소를 함께 운영할 생각을 했나.
우선 든해는 시작할 때부터 문화 공간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영월은 아름다운 곳이지만 문화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은 적은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을 구성할 때 휴식과 차에 중점을 두었다. 하루 묵으면서 문화 예술을 즐기고 또 차 한잔할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다 싶었다.
하필 차(茶)를 선택한 이유도 궁금하다.
국악을 전공하다 보니 아무래도 우리의 전통과 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전통 다도에서는 마지막에 우린 가장 맛있는 차를 손님에게 드린다. 음악으로 따지면 예악禮樂의 사상과 대동소이한 부분이 있다. 나는 그게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상대를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 담긴 한 잔. 커피보다는 차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커피를 더 많이 마신다. 다수의 취향을 따를 필요는 없지만 아예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지 않을까.
그렇다. 커피가 너무 대중적이다 보니까 주변에서도 커피를 팔지 않고도 수익이 나겠냐며 걱정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차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아직까지 우리와 친숙하지 않아서 만들어진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예 커피를 빼고 차를 제대로 알리는 데 집중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 선택은 옳았던 것 같다. 앞으로도 차만 판매할 예정이다.
든해에선 어떤 기준으로 차를 선택하나.
맛과 향 모두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공정무역'으로 들어온 차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소비하는 것 중에는 불공정무역을 통해 생산되는 것이 아주 많다. 대표적인 예로, 커피와 초콜릭 그리고 차가 있다. 앞서 말씀드렸듯 차를 판매하기로 선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담겼기 때문인데, 노동자의 고통을 통해 생산되는 차를 이 공간에서 소비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북촌에 있는 찻집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대표님이 말씀하시길, 좋은 차의 기준은 “공정무역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받은 차”라고 하더라.
정말 공감한다. 최근 인도의 다르질링 지역에서 노동자와 농장주 간의 갈등으로 파업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다르질링이라는 훌륭한 차가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차는 마시는 사람의 입장에선 한잔의 향기로움일 수 있으나, 생산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노동 착취의 결과물일 수가 있다. 사실 이곳에서 공정무역을 통해 소비되는 차의 양은 많다고 볼 순 없지만 작은 한 걸음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블렌딩 차를 직접 제조한다. 블렌딩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생각한 이미지를 어떻게 차 한잔에 담아낼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맛의 그림을 그리는 재료 간의 조화가 중요하다. 조화를 이루려면 각 재료가 가진 특징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문제는 재료의 특징을 안다고 해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때론 블렌딩 재료가 가진 특징이나 맛과 향을 일부러 떨어뜨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만족스러웠던 블렌딩 차는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프루티진저라는 차가 좋다. 지금 바로 앞에 있는 것인데, 제가 처음으로 블렌딩을 시도한 차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생강을 사용했다. 은은한 알싸함이 특징으로, 생강이 다른 제품보다 꽤 많이 들어간 편이다. 주로 차 한 잔 우릴 때 사용하는 총 재료가 3.5g 정도인데, 이 차에는 생강만 2g 정도가 들어갔다. 그럼에도 독하지 않은 이유는 맛과 향을 줄이는 가공을 했기 때문이다.
어제 마신 차도 맛있더라. 이름이 무엇인가?
스트로베리크림슨이다. 설탕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설탕을 대신할 수 있는 식물을 우려서 농축한 뒤 시럽화해서 만든 것이다. 당뇨 환자도 마음껏 드실 수 있다. 그 차뿐만 아니라 든해의 차 대부분이 설탕이나 파우더 농축액 같은 것들이 거의 안 들어간다. 가장 건강한 찻집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영월에서 난 재료로 블렌딩한 차가 있다고 들었다.
이번에 영월브랙퍼스트라는 차를 만들었다. 이 지역의 농부가 생산하는 현미와 메밀로 만든 것인데, 깔끔하고 구수한 맛이 특징이다. 앞으로도 영월의 사계절을 담은 시리즈가 나올 예정이다. 첫 시작인 영월브랙퍼스트는 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다음 여름, 가을, 겨울에 어떤 차가 탄생할지는 아직 모른다. 아마 계절에 맞는 재료를 사용해 계절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차를 만들지 않을까.
한 가지 메뉴를 개발하기 위해서 많은 연구가 필요하 것 같다.
그렇다. 사실 차를 취미로 시작했기 때문에 많이 마셔봤다는 것 외에 기본적인 지식도 없었다. 그런데 든해를 열고 차의 깊이를 알게 되면서 전문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현재 영국의 티 마스터를 스승으로 모시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고 있다. 지금 하는 연구들은 많은 부분이 스승과 협업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공간이 한옥이다. 한옥은 분명 아름답지만 유지하기가 힘들지 않나.
그렇다. 그런데 여기가 원래 한옥이 있던 터다.
그 이유 때문에 한옥을 지은 것인가? 전공인 국악이 공간에도 영향을 미친줄 알았다.
국악을 해서라기보다는 음악을 하다 보니 공간 음향의 가치를 알고 있다. 굳이 음향 장비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공간이 훌륭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음향 효과를 낼 수 있다. 아마 직접 들어보시면 악기가 가진 본연의 순수한 소리에 빠질 것이다.
든해가 영월에 자리 잡은 까닭이 있나.
이 마을은 어머니 고향이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는데 몇 년 전 가족이 하던 사업을 정리하면서 어머니가 전원생활을 원했다. 장소를 물색하던 중에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란 영월을 선택하게 됐다.
어머니 고향이 영월이면 이곳에 정착하기 전에도 놀러온 기억이 있겠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좀 있다. 여름마다 많이 놀러 왔는데 나는 꼭 강변에서 놀았다. 그때는 강변이 모래사장이었고, 막 모래를 파면 자라알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땐 별이 쏟아질 듯 많았어요.
서울에도 자주 가시긴 하지만 어쨌든 현지인이 됐다. 영월에서 생활해보니까 어떤가.
우선 상당히 여유롭다. 생각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까 오히려 주업에 도움을 많이 받는다. 초반에는 좀 답답하고 외롭기도 했다. 도시에서는 먹거리나 놀거리를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여긴 아니지 않나. 젊은 사람도 없고.
든해는 한옥아트스테이라고 소개한다. ‘아트’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가 있나.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문화 공간이니만큼 앞으로 전시나 연주회를 지속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아마 봄이 오면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첫 공연으로는 개인 연주를 해보고 싶다. 뭐랄까, 든해를 시작하면서 음악에 대한 욕구가 좀 더 늘었다. 그다음에는 친분이 있는 음악가나 영월의 숨은 보석 같은 예술가들에게 자신을 알릴 기회를 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차의 효능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싶다. 보통 사람들이 차를 마시면 쉽게 건강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런데 효과를 보려면 엄청난 양의 차를 마셔야 한다. 차의 효능은 무엇인가.
그렇다. 제로 차 한 잔을 마셨다고 그렇게 드라마틱한 효과를 보는 경우는 없다. 차가 건강에 이로운 다양한 효능이 있지만 무엇보다 정신적 이점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면서 얻을 수 있는 여유, 사색의 시간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우리는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든해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아침부터 이어진 촬영을 끝냈다는 안도감과 피로가 몰려왔다. 든해의 숙소에서 그만 푹 자고 싶었다. 하지만 차 한잔 마시고 자라는 박성휘 대표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고, 몇 개의 초에 의지한 공간에서 몇 잔의 차를 마셨다.
박성휘 대표는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그가 말한 재료를 곱씹듯 입 안에 든 차를 음미했다. 공간이 어두운 탓에 차의 색이 보이지 않아서 엉터리로 맞추기도 했지만 편안하고 좋은 시간이었다. 그가 차 한잔 대접해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인터뷰를 마치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그가 내어준 건 차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우리의 시간을 붙잡아두기도 했다. 시간을 빼앗았다는 게 아니라 내가 바라던 휴식의 세계로 안내했다는 말이다. 그날 밤, 티 포트에 담긴 차는 사라졌지만 내게는 어떤 여백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