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청진동 ‘제비 다방’
<거울>, <날개> 등으로 유명한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 그는 연인이었던 기생 금홍과 함께 1933년, 현재의 종로 1가 청진동 입구에 ‘제비’라는 다방을 차린다. 손님은 주로 화가, 신문기자, 그리고 도쿄, 오사카 등지로 유학하고 돌아온 청년들이었다. ‘제비 다방’은 당대 지식인들의 아지트이자 박태원, 김유정 등 동료 문인들과 토론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경영에 미숙한 점이 많아 2년도 안 되어 문을 닫고 말았다.
마포구 상수동 ‘제비 다방’
약 70년이 지난 2012년 4월, 마포구 상수동에 새로운 ‘제비 다방’이 문을 열었다. 1930년대 청진동에서 문화를 공유하던 제비 다방의 이야기를 계승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이곳은 주간에 카페로 운영하다가, 저녁 8시가 되면 맥주와 와인을 파는 인디밴드 공연장 ‘취한 제비’로 간판을 바꾼다. 제비 다방의 문 옆으로는 3개월 단위 공연 일정이 적힌 큰 철판이 보인다.
제비다방이 새로이 자리 잡은 건물은 1988년에 지어졌다. 처음엔 가정집이었다가 용도변경으로 근린생활 시설이 된 이후로는 학원과 사무실로 쓰였다. 이전에는 큰 철문과 구조물이 건물을 감싸고 있었으나 제비 다방을 설계한 건축가 오상훈 씨에 의해 지금은 옛날 벽돌 건물의 골조가 드러나 있다. 건물이 완성됐을 때 새 건물의 낯선 느낌이 아니라 이 건물이 옛날에 있었다는 익숙한 느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내부에서도 익숙한 느낌은 계속된다. 크지 않은 공간, 의자와 테이블엔 그동안 다녀간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벽엔 공연 포스터들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지하에서는 오래된 책 냄새가 난다. 잔잔한 음악이 계속해서 흐른다. 어느 것 하나 거슬리는 것도, 새로운 것도 없는 공간이다. 마치 문을 열고 들어오면 당연히 이런 공간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제비 다방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건 색색의 전구로 꾸민 지하 무대와 무대 위로 뚫려있는 1층의 바(bar)다. 1층 메인 홀 가운데 뚫어 놓은 구멍은 죽어 있던 지하 공간을 살리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1층의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구멍을 통해 지하 공간까지 도달한다. 덕분에 지하는 한결 밝아졌고, 1층에서는 지하에서 진행되는 공연을 훔쳐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 구멍은 채광 효과뿐만 아니라 공연 시 울림통 역할을 한다. 지하의 한 벽면을 모두 차지하는 책장에 꽂힌 오래된 책 역시도 단순한 인테리어 소품이 아니다. 공연이 진행될 때 소리가 울리고 튀는 걸 막아 줄 흡음재를 찾다가 택한 방법이라고 한다.
제비 다방에서는 일주일에 네 번, 오후 여덟 시에서 열 시 사이에 공연이 진행된다. 공연뿐 아니라 단편영화 상영, 전시, 낭독회 등도 열린다. 무료로 입장해 맥주와 하우스 와인을 마시며 자율적으로 공연을 즐기고 난 뒤 후불로 공연 관람료를 지급한다. 관객은 마음 가는 대로 돈을 지급할 수 있다. 처음엔 후불제 공연이라는 낯선 시스템 때문에 운영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공연하는 뮤지션도 만족할 정도로 모금함이 두둑하다고 한다. 공연이 끝나면 뮤지션과 관객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간단히 술을 마실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 공연이 끝난 후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앙코르 공연이 가능하다는 점도 제비 다방만의 매력이다.
새로운 문화 플랫폼
제비 다방은 적은 돈으로 충분히 즐기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공간을 지향한다. 그리고 공연, 책, 커피와 술, 토론, 공부 등 여러 가지 활동을 담을 수 있는 가변적인 공간이다. 임대료가 없어 공연하지 못하는 예술가에게는 마음껏 자신의 음악을 선보일 수 있는 좋은 무대이기도 하다. 제비 다방이 상수동의 어엿한 문화 플랫폼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다. 관객과 뮤지션 모두 돈에 구애받지 않고, 눈치 보지 않으며, 서로를 배려하고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제2, 제3의 제비 다방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