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나이로 치면 불혹不惑이다. 가장 오래됐다고 해서 무조건 제일인 것은 아니지만, 이 집은 그럴 자격이 있다. 어떤 갈등에도 미혹되지 않고 원칙과 억척으로 끌어온 40년이 지금의 노가리 골목을 만들었으니. 이제 아흔이 넘은 창업주 아버지(강효근 씨)를 대신해 맥주와 연탄 앞을 지키는 따님 강호신 씨와 사위 최수영 씨를 만났다.
호프집 자리로 을지로 인쇄 골목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최 당시 이 골목은 인쇄공장 외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장인어른이 ‘여기 일하는 사람들이 한 잔씩 먹고 가면 괜찮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초반 2년 동안은 매일 아침 골목을 쓸며 오가는 사람들에게 인사하셨다더라. 그렇게 얼굴을 익힌 것이지.
노가리는 영업을 개시할 때부터 팔았던 건가?
최 처음에는 OB맥주 본사에서 마른안주를 대줬다. 옛날 문방구에 있던 ‘뜯는 딱지’처럼 멸치, 땅콩, 김 따위가 작은 삼각 비닐 안에 포장돼 왔고 그걸 100원에 팔았다. 그런데 이듬해에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주류 공급자가 안주를 공급하는 건 위반’이라고 했다. 그래서 대체 안주를 고심하던 장인이 노가리를 선택했다.
많은 안줏거리 중 왜 노가리였을까?
최 지금은 씨가 말랐지만, 그때는 그물을 던지기만 하면 만선일 정도로 풍부한 어종이었다. 그만큼 일상에서도 늘 접했던 음식이고. 여기서 맥주 마시는 양반들은 대단히 갖춰진 안주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김 몇 장에도 한 잔씩 마시고 가는 사람들이니까. 또 매장이 워낙 작으니 뭔가 조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노가리는 연탄불에 휘익 구워 바로 내기도 좋고. 여러 여건이 들어맞았다.
노가리와 고추장이 100원이고 맥주가 380원, 합쳐도 500원이 되지 않는다. 그 시절 물가로도 싼 편이다.
강 커피 한 잔이 500원이던 시절인데, 여기 오면 500원 내고 20원씩 남겨 갔다. 음료수나 커피를 마실 바엔 맥주에 노가리 먹는 게 요즘 말로 ‘가성비 갑’이었던 것이지. 중간에 바닥 한번 쓸어낼 겨를 없이 바빠서 바닥에 깔린 노가리 껍질 속에 발이 푹푹 빠질 정도였다. 추억이다.
둘러보니 오래된 단골이 참 많다.
최 저기 앉은 분이 드시는 건 종이에 적지도 않는다. 마시는 양이 늘 일정하고, 맨날 보는 얼굴이니까. 보통 초저녁까진 20~30년 된 단골들이 퇴근길에 거쳐 간다. 맥주는 안 마실지언정 가는 길에 들러 안부도 묻고. 그들 덕에 여기까지 왔다. 그저 고맙고 송구하다.
사실 어느 호프집에나 다 있는 메뉴인데 사람들이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강 냉장고는 온도 관리가 까다로워서 요새 호프집 대부분이 급속 냉각장치를 쓰는데, 이 집만큼은 여전히 맥주를 냉장 숙성한다. 이런 고집스러움이 사람을 이끄는 맥주 맛이자 비결이고.
최 인터넷에 ‘야장’ 문화가 알려진 것도 결정적 역할을 한 것 같다. TV에도 몇 번 나가더니 주말엔 젊은 사람도 많이 온다. 화장실도 낡았고, 좁고 시끄러워 불편한데도 그걸 감수하고 먹을 만큼 재미진가 보다.
아마 고추장 맛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거다.
강 쉽게 만들지 않으니까(웃음). 별 것 아닌 듯 보여도 굉장히 정성을 많이 들인다. 그렇기에 39년 전이나 지금이나 맛이 똑같다. 지금이야 매운 음식이 워낙 많지만, 그 옛날 1980년대에는 매운 음식이랄 게 별로 없었다. 파격적인 매운맛이었지. 오죽하면 ‘고추장집’이라 불렸겠나.
이 맥줏집을 언제까지 지킬 생각인가?
강 아버지가 여든일곱 살까지 현역에 계셨다. 지금도 몸만 여기 안 계실 뿐 매일 새벽에 맥주 주문 확인하고, 수시로 “얘, 내일 날이 춥단다. 온도 내리렴, 올리렴” 전화한다. 내 아버지여서가 아니라 선대 사장님으로서, 그 긴 세월을 꿋꿋하게 지켜온 분으로서 존경한다. 중심과 마음이 중요하다. 그 마음을 알기에 원조집의 정체성을 변함없이 유지하며 ‘정통 생맥줏집’으로 남고 싶다. 그러니 나도 여든 살까진 있지 않을까(웃음).
※ 본 콘텐츠는 《아는동네 아는을지로》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