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모든 것에 지쳐있었다. 며칠간 잠을 설쳐 피곤한 데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목은 칼칼했고, 어쩐지 배도 살살 아팠다. 뾰로통하게 날이 선 기분과 다른 건 오직 날씨뿐이었다. 봄날의 오후 세 시는 무척이나 나른하고 따뜻했다.
약속 시각 오 분 전. 계단을 올라 4층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인기척이 없어 다시 누르려던 찰나에 문이 열렸다. 열린 문 뒤로, 동그란 안경을 쓴 짧은 머리의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안내했다.
" 어서 오세요. 사적인 서점입니다. "
‘취향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독립출판물을 판매하는 서점을 시작으로 여행, 사진, 음악 등 특정 카테고리를 콘셉트 삼은 소규모 서점들이 동네마다 번지고 있다. 사적인 서점은 그중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생겼다. 공공장소여야 할 서점이 사적(私的)이라니. 무슨 말인고 살펴보니 ’한 사람을 위한 큐레이션 책방’이란다.
사적인 서점은 출판사 편집자이자 서교동 땡스북스 매니저로 일했던 정지혜 씨가 지난가을에 연 책방이다. 서점은 철저하게 예약제로 운영된다. 예약자는 ‘책 처방사’인 정지혜 씨와 한 시간가량 일대일 상담을 하게 되고, 이날 상담을 진행하며 작성한 독서차트를 바탕으로 정지혜 씨는 예약자를 위한 책을 선정한다. 그렇게 처방한 책은 상담일로부터 최대 열흘 후, 예약자의 집으로 배송된다. 이름만큼이나 독특한 콘셉트와 시스템이다. 금세 입소문이 날 정도로 인기가 좋아서 나도 한 달을 넘게 기다리고서야 가까스로 예약에 성공했다.
우측 작은 부엌을 지나서 안쪽으로 들어가자, 정갈하게 꾸민 하얀 서재가 등장한다. 이전에 들러본 작은 책방보다도 한층 더 아담하다. 가방도 벗지 못한 채 서가를 둘러보는 내게 그녀가 말을 건넸다.
" 제가 마실 차를 준비해올 동안, 읽고 싶거나 알고 싶은 책을 세 권 골라주세요. "
서가에 책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고르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심사숙고를 거듭한 끝에 <여행의 문장들>, <개인주의자 선언>, 문예지 <Littor> 4월호를 집어 들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서점은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고, 내 앞에 놓인 잔에 차를 따르며 그녀가 물었다. 별것도 아닌 질문인데 말이 얼른 나오지 않아 차로 입술을 축였다. 달고 향긋한 것이 들어가니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다.
대화 초반은 문답 형태로 진행된다. 세 권 각각을 선택한 이유부터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인지, 즐겨 읽는 책 분야와 기피하는 분야, 좋다고 생각하는 책의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주인장이 물었고, 나는 성실히 답했다. 처음에는 대답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평소에 좋아하는 책이며 작가가 누구였는지 기억해 내려 용을 썼으나, 단번에 떠오르긴커녕 머릿속이 온통 백지장 같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지금 내 방 책장에 꽂힌 책을 생각해 내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더욱 솔직한 태도로 임할 수 있었다. 등장인물 이름 구분이 어려워 국내소설만 읽던 내가 해외소설을 읽게 된 계기며 에세이를 좋아하게 된 연유, 그리고 작가의 말 한 줄까지 구구절절 공감하며 읽었던 책 이야기를 하는 사이 대화는 한층 자연스럽게 풀려나갔다. 상담하는 것이 처음이라 우물쭈물하다가 돌아오진 않을까 내심 걱정했던 건 기우에 그쳤다. 대화 주제도 점차 넓어졌고, 나중에는 영어가 막 트인 뜨내기 학생처럼 신이 난 내가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어느덧 뒷전으로 밀려난 책 대신 서로가 경험한 여행 이야기를 쭉 하던 차에 그녀가 물어왔다.
예약 당시 작성하신 신청서에서 지금 하는 일을 묻는 문항에 ‘무엇이든 쓰고 있다’고 적어두셨어요. 어떤 것을 쓰고 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런 말을 적었던가? 거진 두 달 전에 쓴 신청서라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고작 그 두 달 동안에도 많은 일이 있었으며 이런저런 주변 상황이 변화했지만, 어쨌거나 무엇이든 어설프게 쓰고 있는 것만은 여전했다. 나는 그간 끄적거려온 것과 더불어 ‘쓰는 일’을 포함하여 가까운 시간 내에 더듬었던 고민거리를 그녀 앞에 풀어놓았다. ‘먹고사니즘’에 매몰된 청년으로서 가지는 흔한 불안과 진로에 대한 번민, 미숙한 글재주에 대한 회의와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관한 것들까지.
저는 늘 넓고 얕았어요. 취향이나 취미마저도 진득하게 파고든 적이 없죠. 깊이 빠져드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나마 열심히 해 보고 싶은 분야가 한때 있었는데, 그도 지금은 희미해졌어요. 뭐랄까. 흐지부지의 역사네요.
아무리 상담이라지만 초면에 너무 많은 말을 한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쏟고 나니 한결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오기 전까지 곤두서 있던 신경도 조금 느슨해졌다.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정리한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뗐다.
하나를 진득이 파고드는 것도 좋지만, 일단 본인이 즐거운 일을 얕게든 깊게든 해 나가면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상상도 못 했던 기회가 생기기도 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앞으로 나갈 수 있어요. 저도 제가 서점 주인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스스로 독립해 서점을 열려고 했을 때 두려웠고요. 그래도 재미를 쫓아 하나씩 하다 보니 이젠 확신이 들어요. 그러니, 흐지부지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서점을 다녀오고도 여느 때와 같이 정신없는 날들을 보냈다. 그렇게 여드레쯤 지났으려나. 늦은 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방에 작은 상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처방전이었다. 상자 안에는 책 한 권과 짧은 편지가 들어있었다. 편지 속에는 책의 간단한 줄거리와 책을 선정한 이유, 그리고 책 속 문장이 담겨있었다. 내게 전하는 응원의 메시지도 함께.
글을 쓰고 여행을 좋아하며, 맥주를 사랑하는 다솜님. 다솜님이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모든 일을 작고 소박한 방식으로 시작하는 데 이 책이 작은 용기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이부자리 한 쪽에 앉아 몇 자 되지 않는 그 짧은 글을 몇 번이고 곱씹다가, 씻지도 못한 채 잠이 들어버렸다.
요즘 잠자리에 들기 전, 처방받은 책을 조금씩 읽는다. 책을 펼칠 때마다 아늑했던 그 날의 서점이 떠올라 어딘가 포근한 기분이 든다. 서점을 다시 찾을 날, 전하고 싶은 말도 생각한다. 고맙고 따뜻한 처방이었다고. 덕분에 충분한 용기를 얻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