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 미로처럼 이어진 삶

서동미로시장

조혜원|

나이가 지긋한 재래시장은 대부분 지역의 역사를 품고 있다. 왜냐면 시장은 사람이 모인 곳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서동은 1960년대 말, 산복도로 주변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영주터널 건설을 위해 정책적으로 강제이주시킨 결과 형성된 마을로, 인근에 금사공업지역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들었고, 1970년대에는 시장이 형성되었다.



" 그땐 콩나물도 한두 봉지가 아니라 5통, 6통씩 사 갔어. 그만큼 주변 가게들도 장사가 잘되고 찾는 사람이 많았지. 삼화고무, 우영제화, 동경산업 같은 공단이 있을 땐 여기가 부산에서 제일 사람이 많은 동네였어. "


30년이 넘도록 시장 한가운데를 지켜온 목욕탕인 서동탕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그 시절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 공단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몰리니까 방 하나에 주방 하나인 단칸방이 주루룩 있었어요. 지금도 시장 골목 양옆으로 집들이 다닥다닥 있잖아요~ 그게 다 옛날 흔적이 남은 거예요. "



구불구불 미로처럼 얽힌 서동미로시장은 서동향토시장, 서동시장, 서동전통골목시장까지, 총 3개의 시장을 하나로 아울러 부르는 이름이다. 비탈을 따라 언덕길 위에 형성된 기나긴 서동전통골목시장이 가장 처음 생긴 시장으로, 시장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면 끝이 보이지도 않아 기차 골목이라 불리기도 했다. 아래쪽에 넓게 자리한 서동향토시장에는 과일, 채소, 이불가게, 식당 등이 모여 있고 오르막길을 따라서는 구제 의류 상점이나 분식집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마치 나뭇잎처럼 중심선을 따라 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시장에서 양옆으로 뻗은 길엔 자그마한 주택들이 열을 맞춰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주 보고 있는 집의 문이 열렸을 때, 겨우 서로 닿지 않을 최소한의 거리만을 허락하는 좁은 골목. 이곳에서는 오로지 어르신들만이 지팡이를 짚고 앉아 시간을 흘려보낸다.



2014년, 서동시장 육성사업단이 시장 활성화 사업을 시행하면서 깨진 타일 틈에 그림을 그려 넣고, 쓰레기가 쌓여있던 공터에는 무화과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그러한 덧칠도 오랜 세월을 미처 다 가리진 못했는지 마치 옛 홍콩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곳에는 시간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



부산 경제 발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삼화고무가 1992년에 문을 닫으면서 젊은이는 대부분 타지로 옮겨갔고 시장 역시도 침체의 길을 걸었다. 그래도 시장을 떠나지 않고 2대째, 30년째 장사를 하는 상인들은 예전만 못하다는 가벼운 탄식만 뱉을 뿐 푸념을 터트리진 않는다.


" 학생들이 많이 오니까 가격을 올릴 수가 없지. "


" 오랜 단골이 많아서 가격을 안 올렸어요. "



그 얘기를 듣고는 가벼워지는 마음 덕에 돌아갈 길이 먼데도 배낭을 가득 채웠다. 기차 안에서 먹을 옛날 과자, 양념 닭발을 좋아하는 아빠의 술안주 조금, 가족과 함께 먹고 싶은 어묵 한 아름까지.



재래시장이라고 정이 가득하지만은 않다. 매스컴의 조명으로 인해 지역주민들이 아닌 관광객이 모여드는 걸 경계하는 상인들도 있다. 요란스럽게 몰려와 허락도 없이 사진을 찍고 TV에 출연한 유명 맛집만 들렀다 가는 뜨내기손님이 반갑지만은 않을 터. 서동시장을 취재하러 왔다는 나에게 고생한다고 김밥 한 줄이라도 더 얹어 주려는 상인도 있지만 “우린 그런 거 안 해요”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다. 나는 취재를 거부하신 분들을 야속하게 여기기보다는 도리어 그분들에게 죄송스럽단 생각도 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인 대부분은 친절하다. 몇 바퀴를 돌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시장길 가운데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먼저 길을 알려주기도 하고 커다란 카메라가 무겁지 않느냐고 말을 건네신다.



시장은 그들의 일터이기도 하고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시장을 구경하러 온 이들은 ‘손님’으로 찾아와 오랜 시간 풍파를 겪으며 미로처럼 이어온 시장 상인들의 삶을 엿보게 된다. 나는 당연한 듯 그들의 삶을 침범하고 구경거리를 대하는 듯한 태도일랑 접어두고, 지극히 당연한 손님의 자세로 복잡한 시장을 걷기 시작했다

에디터

* 편집자: 강필호, 박혜주

조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