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이전 동네에서 가장 상권이 좋은 자리에는 슈퍼마켓, 비디오가게, 쌀집, 문방구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빵집, 분식집, 미용실, 복덕방 등이 있었다. 가게 주인들은 대부분 장사한 지 10~20년이 훌쩍 넘은 동네 터줏대감이었고, 당시 쌀집 아저씨, 슈퍼마켓 아줌마, 분식집 누나는 주민과 한동네에서 동고동락하는 가게 주인 이상의 존재였다. 시간이 흘러 동네 가게들은 편의점과 화려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프랜차이즈 공간으로 하나둘 탈바꿈했지만, 많은 이의 추억 속에는 ‘나만의 동네 가게’ 한두 곳이 남아 있다. 커뮤니티로서 기능하던 동네가 생활 편의 중심으로 변화해온 지금, 어떤 동네에서는 추억 속 상점을 연상케 하는 ‘낯선 상점’이 등장하고 있다.
위: 동네 쌀집을 새롭게 재해석한 동네정미소 성산
아래: 빈티지 연필 편집숍 흑심 / ⓒ 땅별메들리
최근 밀레니얼이 많이 찾는 동네에 가면 식음료 편집숍, 동네 쌀집, 연필 편집숍, 멤버십 기반의 살롱과 코워킹 스페이스 등 이름도 낯선 로컬 상점들이 제법 눈에 들어온다. 몇 년 전 동네 서점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로컬 상점이 탄생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시에는 규모의 경제를 기반으로 한 대기업의 프랜차이즈와 소상공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로컬 상점이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이른 시기에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앞세워 선전했던 많은 로컬 상점에 대해 우려가 앞섰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수익 구조와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지만, 개성있는 작은 로컬 상점이 사람을 끌어당기고 나아가 동네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동네 서점은 책을 파는 공간을 넘어 책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연결의 공간’으로서 동네 문화와 커뮤니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는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20년 전 단골 고객 중심의 동네 장사가 품고 있던 느슨한 커뮤니티가 새로운 로컬 상점들을 통해 재해석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업 모델이 탄생하고 있다.
전 세계인이 온라인을 통해 소통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동네 커뮤니티나 로컬 상점을 언급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과거로의 회귀이자 추억팔이 정도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트렌드는 아마존이나 바이두 같은 e커머스 중심의 소비 구조가 가속화되는 시대에 오프라인 숍이 단순 소매업을 넘어 다른 무언가를 팔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커뮤니티 서비스를 제공하는 로컬 공간이 IT 기반의 에너지 효율 도시에서 인간적인 삶을 모색하는 커뮤니티 지향형 동네로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중심의 독점적 유통 시장은 시간을 파는 편의점, 공간을 파는 프랜차이즈 카페로 가득찬 획일적인 도시를 만들어버렸다. 잃어버린 동네 상권 문화를 복원해 지역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오프라인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며, 이는 곧 경쟁력 있는 로컬 브랜드를 의미한다. 성심당, 이성당, 삼진어묵 같은 브랜드는 60년 넘게 지속적으로 지역민과 소통해왔고 이제는 지역을 넘어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가 됐다. 장인 정신을 가진 한 브랜드가 지역을 거점으로 오랫동안 성장해왔다는 사실은 로컬 브랜드가 지역의 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위: 지역 양조장을 리뉴얼한 강릉 버드나무 브루어리
아래: 가업으로 이어오던 조선소를 문화 공간으로 재해석한 속초 칠성조선소
동네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영업해온 로컬 상점은 이제 하나의 브랜드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라이프스타일 커뮤니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로컬 창업가들에게 재화 판매를 늘리는 것 외에도 새로운 문화적 사업을 전개할 수 있다는 혁신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경쟁력 있는 로컬 브랜드가 동네 단골 장사를 넘어 지역 기반 브랜드로 성장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미 강릉의 버드나무 브루어리, 부산의 덕화명란, 울산의 복순도가 등은 경쟁력 있는 전국 브랜드로 소비되고 있으며, 속초의 칠성조선소나 동아서점 같이 역사성을 가진 브랜드는 지역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해 차별화된 콘텐츠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기술의 발전이다. 동네에서 시작한 로컬 상점이 브랜드의 이야기와 콘텐츠를 기반으로 다양하게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비롯해 각종 온라인 플랫폼이 대중화되면서 동네에서 차별화된 공간 콘텐츠로 인정받으면 곧 전국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밀레니얼은 온라인에서 본인의 콘텐츠를 알리고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이렇게 모인 온라인 트래픽은 기존의 유동 인구와는 관련 없는 새로운 오프라인 트래픽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만의 콘텐츠가 있는 사람에게는 입지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본인의 사업이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에 어울리는 동네와 공간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존에는 넓은 도로가 있거나 교통이 편리한 곳이 중요한 상권으로 떠올랐다면, 오늘날에는 전국의 다양한 골목으로 젊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현상이 이를 방증한다. 이제 공간의 콘텐츠가 사람을 모으는 시대이자 콘텐츠가 도시의 부동산을 움직이는 시대다. 삶의 질과 정체성을 중요시하는 밀레니얼이 동네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펼쳐내기에 더없이 좋은 시기가 오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부정적인 경제 이슈가 난무하는 이 시기에 창업 전망이 좋다는 비현실적인 예견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소상공인에 대한 개념을 바꿔야만 새로운 비즈니스의 잠재력을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소상공인이 열악한 비즈니스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나, 공공의 지원이나 보호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IT 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불러온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인해 소매 위주의 기존 사업을 지속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는 한편, 소상공인에게는 판매자가 아닌 크리에이터의 자질이 요구된다. 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크리에이터는 로컬 브랜드를 창업한 뒤 이내 로컬 스타트업으로 발전해나가고, 곧 글로벌 서비스로 성장할 가능성까지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성장했던 블루보틀, 포틀랜드의 에이스호텔 같은 로컬 브랜드가 머지 않아 우리 주변에서도 탄생할 수 있는 이유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연결’이다. 사람과 사람의 연결, 사람과 공간의 연결, 사람과 지역의 연결은 지역만의 콘텐츠에 기반하는 지속가능하며 미래 지향적인 동네로 나아가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로컬 비즈니스가 다양한 영역에서 시장성을 가지고 자립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언젠가 크리에이터 중심의 소프트웨어 도시에서 개인의 취향을 소비하는 날도 올 것이다.
※ 본 콘텐츠는 《아는도시 01: 로컬전성시대》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