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0여 년 동안 성심당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쳐왔다. 먼저 창업 과정을 간결하게 되짚어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창업주는 함경남도 함주 출신으로 한국전쟁 중 종교 탄압을 피해 월남했다. 영화 〈국제시장〉에도 등장한 흥남 철수 당시 창업주 일가족은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몸을 실었고, 잠시 거제도에 머문 뒤 진해에 정착했다. 이후 서울로 이주하고자 열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열차 고장으로 의도치 않게 대전에 머물게 됐고, 성당에서 원조받은 밀가루 두 포대로 찐빵집을 시작한 것이 오늘날 성심당의 기원이다.
당시 대전은 철도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로 전후 원조 경제의 대표적인 식품 중 하나였던 밀가루가 다량 유통됐다. 또한, 대전 주변 평야지대에서도 밀이 많이 재배됐기 때문에 이를 저렴한 가격에 매입해 비교적 수월하게 찐빵집을 운영할 수 있었다. 덕분에 1958년, 월세로 작은 가게를 마련한 뒤 업종을 제과점으로 변경했다. 당시에는 빵이 선진국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고급 식품으로 통했다. 답례품으로 인기가 많았던 것은 물론이고, 카페 문화가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제과점은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1960~1970년대를 거치는 시기에는 운영이 전반적으로 순조로웠던 편이다.
성심당을 아들 임영진 대표가 가업으로 잇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남편 임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저런 일을 돕긴 했지만, 빵집을 이어받을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1974년 여름, 공장장을 비롯한 제빵 기술자 다섯 명이 종적을 감추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 사건은 제과점 수보다 제빵 기술자 수가 적었던 업계 상황과 소유주가 제빵 과정에 관여하지 않는 영업 방식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발생했다. 임 대표는 가게를 살리고자 제빵 기술을 배우며 본격적으로 빵집 운영에 참여했다. 당장 정상적인 영업이 어려울 정도로 큰 위기였지만, 부단한 노력을 통해 성심당의 제조 공정 전반을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성심당의 대표 상품인 튀김소보로
ⓒ 성심당
위기를 겪은 뒤 맞이한 1980년대에 간판 상품 ‘튀김소보로’가 개발됐다.
그때는 제과점이라 해도 빵 종류가 많지 않았다. 단팥빵, 소보로, 크림 빵, 도넛 정도였고 당시 대전에 있던 제과점에서는 어디나 비슷한 빵을 내놓고 있었다. 그때 임 대표는 새롭게 합류한 오용식 공장장과 함께 우리만의 빵을 개발하겠다고 결심했다. 일반적인 빵집의 주력 메뉴였던 단팥빵의 달콤함, 소보로의 고소함, 도넛의 바삭함을 모두 담은 새로운 빵을 만들고자 했고 그 결과로 기획된 빵이 바로 튀김소보로다.
요즘은 고급 디저트나 빵이 대중화됐다. 그런데 튀김소보로는 한국적인 빵이면서도 여전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그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튀김소보로는 한국인이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여러 식감과 맛을 두루 품고 있다.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바삭한 음식은 누구나 좋아한다. 거기에 더해 팥앙금 특유의 은근한 달콤함도 매력적이고, 소보로의 고소한 맛도 일품이다. 특히 수십 년째 1,5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고 있어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다는 장점 역시 인기에 한몫 한다. 그러나 1990년대 전후로는 튀김소보로를 비롯한 효자 메뉴들이 한동안 찬밥 신세였던 적도 있다.
시장 상황 변화에 따른 대응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인가.
그렇다. 1990년대가 되면서 아파트 주거 양식을 중심으로 하는 라이프스타일이 형성됐고, 그에 발맞춰 단지 내 상가를 기반으로 프랜차이즈 베이커리가 일상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8년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해외여행 자유화 조처가 내려지면서 크루아상, 바게트와 같은 유럽식 빵이 국내에 도입돼 인기몰이를 했다. 물론 우리도 시대 변화에 발맞춰 신메뉴 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끝도 없이 바뀌는 트렌드를 좇는 것이 힘겨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전 서부의 둔산 지구가 새롭게 개발되고 핵심 관청 대다수가 이전하면서 성심당 주변 대흥동, 은행동 일대 상권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자금난과 같은 여러 내부 문제 속에서 기존 효자 상품에 대한 관심도 시들해졌다. 그러다 2005년 본점 생산 설비가 대부분 전소된 화재가 발생했다.
다시 일어설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큰 화재였다고 하던데.
화재를 겪은 이후로는 빵집을 하는 이유와 성심당의 정체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리는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뜻을 담아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라는 사훈을 내세웠다. 여기서 ‘모든 이’란 고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협력사, 거래처까지 아우르는 개념이며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를 가리지 않는 보편적 가치를 좇겠다는 뜻을 담았다.
또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던 빵의 매력과 가치를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유행 변화에 따라 신규 상품 개발에만 집중하면 그만큼 아이템이 많아지고, 맛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튀김소보로, 판타롱부추빵 등 대표 메뉴의 패키지와 제조 공정을 새롭게 정비했다. 이러한 내부적인 노력에 더해 미디어의 조명까지 받으며 성심당은 극적으로 부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개발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얻으면서 그 유명세는 전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는 데 기여한 성심당 대전역점
ⓒ 성심당
이제 대전을 방문한 여행객이 튀소, 부추빵 선물 세트를 들고 기차에 오르는 모습은 당연하다고 여겨질 정도다.
선물 세트 아이디어는 일본 방문길에 우연히 발견한 카페에서 얻었다. 이 상품은 성심당이 대전역에 입점하면서 폭발적인 관심을 얻기 시작했다. 튀김소보로를 구매하고 싶어도 성심당 점포가 원도심에 있어 방문 구매를 망설였던 이들이 대전역을 오가며 간편하게 선물 세트를 구매할 수 있었고, 덕분에 KTX에는 성심당 쇼핑백과 선물 세트 상자를 든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튀김소보로가 전국적인 인지도를 지닌 상품으로 뻗어나가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오로지 대전에서만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 희소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
만약 천안 호두과자가 고속도로 휴게소가 아닌 천안에서만 판매되는 상품이었다면 천안이 맛의 도시, 관광 도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란 얘기를 임 대표가 종종 한다. 이처럼 식음료 상품은 특정 도시에 남아 있어야만 명물이 되고 가치 있는 상품으로 인정받는 측면이 있다. 마찬가지로 튀김소보로는 지역의 문화와 정서, 추억을 담은 빵이고 나름의 스토리와 역사가 있어 유명한 것이 아닐까? 고객은 빵에 얽힌 무형적 요소에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비록 최고의 맛은 아닐지라도 그 맛이 기억에 깊이 남는 것 같다.
사실 대전은 도시 브랜딩이 명료하진 않다. 부산의 바다, 전주의 먹거리와 같은 뚜렷한 상징이 없다고 볼 수도 있는데, 대전의 지역성은 성심당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일단 대전은 관광 도시가 아니다. 그리고 내륙 교통 요지에 있어 숙박 수요가 적다. 방문자는 대부분 이 도시에 머물기보다 특정 장소에 들른 후 곧바로 떠난다. 결정적으로 KTX가 생기면서 그나마 있던 호텔들마저 상당수 문을 닫았고, 그동안 성심당은 지역 내 수요를 바라보며 베이커리 운영을 이어왔다. 물론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은 이후로는 타지역 분점에 대한 유혹이 많았다. 인생에 몇 번 없을 좋은 기회라는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해외의 로컬 베이커리 사례를 접하며 ‘찾아가고 싶은 빵집’이 되겠노라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많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대전은 관광 도시가 아니고, 원도심 일대는 찾아오기도 어려우며, 주차장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팝업스토어를 성황리에 마쳤고, 유통업계의 러브콜이 한층 더 거세졌다. 여러모로 마음이 흔들릴 때 일을 돕는 박창호 PD의 한마디가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다.
“만약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한국을 방문한다면 성심당 롯데백화점 분점을 가고 싶을까요? 아니면 성심당 대전 본점을 가고 싶을까요?”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 본점은 성심당 고유의 철학이 녹아 있으므로 우리다운 매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분점을 냈을 때도 과연 완성도 높은 점포를 구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또한 분점에서 일하는 직원도 성심당만의 DNA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인사 관리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해서 오히려 본점에 더욱 집중하기로 했다.
성심당 케익부띠끄
ⓒ 성심당
지역 창업을 준비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이라고 보나.
사실 이런 주제에 대한 의견을 밝히기가 조심스럽다. 창업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성심당은 이미 거대 기업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도 밀가루 두 포대로 시작했고 산전수전을 겪어왔다. 그 경험을 토대로 얘기해보자면, 일단 조급한 마음을 버려야 한다. 요즘은 올해 창업하고 내년에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참 많다. 물론 성심당과 같은 성공 사례는 대체로 결과론적인 관점에서 분석될 수밖에 없지만, 그 속에는 60년에 걸친 영광과 눈물이 함께 담겨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국은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것이 관건이고, 조금 더 멀리 보고 긴 호흡으로 사업을 대해야만 값진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창업 아이템이 획일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조금 아쉽다. 근본적으로 왜 이 사업을 운영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 고민 없이는 위기 앞에서 뚝심 있게 사업 운영을 밀고 갈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허드렛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자세도 꼭 필요하다. 매장 청소, 창고 정리 등의 기본적이지만 고된 일을 해내야 사업의 본질을 지켜낼 수 있다고 본다.
끝으로 지향하는 가치 또는 목표를 듣고 싶다.
성심당은 최근 경영을 통해 공동선을 실현할 수 있다는 EoC(Economy of Communion) 철학을 따른다. 이는 개인을 넘어 기업과 산업의 영역에서 더 높은 차원의 재화 공유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톨릭 신앙에서 시작해 보편적인 사회 운동으로 확장돼나간 이 철학은 성심당이 걸어온 길과 맞닿아 있다. 그동안 포괄적인 개념에서 착한 기업으로 일해왔다면, 이제부터는 환경 문제나 기후 문제에 대해서도 책임감 있는 자세로 대응해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요즘은 다른 가치를 창출하는 매체로서 빵을 대한다. 우리에게 빵이란 생계 유지의 수단은 맞지만, 지역 활성화, 사랑의 공동체, 빈곤 문제 해결 등 제3의 가치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동력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빵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열심히 노력하면 빵으로도 얼마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애정을 담아 빵을 만들면 그 빵을 먹은 사람이 행복해지고, 긍정적인 선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지지 않겠냐는 의미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한결같은 맛과 서비스로 지역과 더 큰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로컬 베이커리로 남고 싶다.
Interviewee 김미진
1982년 임영진 대표와 결혼 후 홍보이사로 재직하며 성심당의 정체성을 담은 문화 콘텐츠를 총괄하고 있다. 또한 EoC(Economy of Communion, 모두를 위한 경제) 한국 책임자로 기업 안에서 사랑과 나눔의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 본 콘텐츠는 《아는도시 01: 로컬전성시대》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