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소월길 밀영

조윤|

마을버스 종점이 있는 후암동의 어느 작은 로터리. 건물 귀퉁이에 있는 하늘색 문을 열고, 좁은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그곳에 디저트 카페 ‘소월길 밀영’이 있다. 간판, 인테리어, 디저트 모두 어느 것 하나 튀지 않고 자연스러운 이곳은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힙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어딘가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다.

소월길 밀영을 운영하는 김규완 씨는 남산 자락의 분위기가 좋아 후암동에 정착했다. 그는 오래된 적산가옥에서 플리마켓을 열기도 하고, 후암동 동네 지도를 제작하기도 하며 동네에 대한 애정을 가꿔왔다. 그러는 동안 후암동도 조금씩 변해갔지만, 소월길 밀영은 어느새 후암동 풍경의 일부가 되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소월길 밀영 김규완 사장


후암동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20여 년 전쯤 외근 차 후암동을 처음으로 방문했는데 동네가 정말 좋아 보이더라. 서울 한가운데 이처럼 조용하고 아늑한 동네가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무턱대고 후암동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직장을 옮기면서 집을 잠시 분당으로 옮기기도 했지만, 결혼 후 다시 후암동으로 돌아왔다.




운영하는 가게와 집이 모두 후암동에 있다. 일하고 생활하며 느낀 후암동의 매력은 무엇인가.

워낙 산을 좋아하기 때문인지 후암동이 남산 자락에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인 것 같다. 동네 어디에서나 보이는 남산 타워가 등대 같은 역할을 해서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사실 아현동 달동네도 이곳처럼 경사지를 따라 동네가 형성되었지만,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 높은 건물에 시야가 막히지 않나. 반면 후암동은 남산 경관 보호를 위해 개발이 제한되어 있어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지 못했다. 이처럼 서울의 다른 동네와는 달리 높은 빌딩이나 아파트가 없다는 점이 후암동을 마을다운 마을로 만들어주는 것 같다. 사실 후암동이라는 동네 자체에 눈에 띄게 특별한 건 없다. 최근 개성 있는 공간들이 조금씩 생기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평범한 것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분위기 그 자체가 후암동의 매력인 것 같다.


소월길 밀영이 문을 연 2013년 당시 후암동은 카페 하나 찾아보기 힘든 주택가 동네였다. 교통이 무척 편하지도, 상권이 크게 발달하지도 않은 동네에 디저트 카페를 여는 것이 큰 도전이었을 텐데.

6년 전, 점포 임대를 물색하며 후암동뿐만 아니라 경리단길에도 갔었다. 당시 경리단길은 서서히 뜨는 분위기였는데, 그런 곳에서는 본격적인 장사를 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이 들더라. 물론 현 위치는 애매한 점이 많다. 상권의 중심에 있는 것도 아닌 데다, 바로 앞에 나무 세 그루가 있어서 여름이면 가게가 완전히 가려진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모한 선택이었다. 그래도 차차 단골이 생기고, 후암동을 찾는 사람들도 조금씩 많아지면서 어영부영 가게가 운영되더라. 사실 처음 하는 가게가 잘 될 확률은 정말 낮지 않나. 지금 와서 옛날 모습을 돌아보면 메뉴나 인테리어가 정말 볼품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꾸준히 밀영을 찾아준 손님들에게 무척 고맙다.



후암동종점 로터리


그래도 이 주변은 마을버스 종점이 있는 로터리이자, 동네를 위아래로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위치다. 이러한 입지가 분위기를 정답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후암동 안에서도 용산고교 사거리 주변은 상점이 생기고 사라지며 풍경이 자주 바뀐다. 그렇지만 이곳은 주요 상권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서 변화가 거의 없다. 밀영이 있는 이 건물은 밖에서 봤을 땐 가건물 같기도 하고, 불안정해 보인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오면 분위기가 무척 아늑하고, 창밖을 조망하는 느낌도 좋다. 또, 거리를 내려다보면 항상 어르신들이 모여 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게 참 서울답지 않으면서도 편안하다. 손님들도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소월길 밀영의 대표 메뉴인 '앉은뱅이밀 카스텔라'


건강한 재료로 만든 디저트에서 나름의 철학과 신념이 엿보인다. 신메뉴 개발도 게을리하지 않는 듯한데.

최근 남도 흑밀 케이크를 개발했다. 남도에서 농사를 짓는 손님이 있는데, 그분을 통해서 접한 검정밀을 활용한 것이다. 생각보다 재료 간의 궁합이 좋고, 손님들의 반응도 괜찮아서 뿌듯하다.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카스텔라도 일반 밀이 아닌 토종 앉은뱅이 밀로 만드는데, 글루텐이 적고 효소가 많아 소화가 잘된다. 그 밖에도 와사비 마카롱을 만드는 등 어울릴 만한 재료가 있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하려 한다.




가게에서 독서 모임이나 제과 강습 등을 열기도 한다. 문화공간을 지향하는 것인가.

초창기에는 모임이 더 많았다. 영화 또는 음악 감상회, 드로잉 강좌, 요가 클래스 등을 하기도 했다. 물론 처음엔 다양한 사람들이 오는 문화공간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가게를 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더라. 이후 그런 역할을 하는 공간들이 주변에 조금씩 생기기도 했고, 오래 남을 수 있는 가게를 하려면 본업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모임의 숫자를 줄였다. 물론 내가 워낙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독서 모임은 유지하고 있다. 모임이라고 해서 무언가 거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근처에 사는 주민분들이나 단골들과 모여 함께 책을 읽고 담소를 나누는 정도다.



후암동 동네 지도


지금까지 후암동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그중에서도 후암동 동네 지도를 제작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동네는 어떤 방식으로든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느 시점의 동네 모습을 기록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는 생각에 후암동 지도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도는 총 9장으로 구성될 예정이고, 후암동에서 갈월동까지 아우른다. 갈월동까지는 한 생활권에 해당한다고 보지만, 해방촌 일대는 조금 이질적인 느낌이라 지도에 포함하지 않았다. 지도에 있는 집 하나하나가 실제로 이 동네에 있는 집들을 본뜬 것이다. 밑그림과 채색 모두 밀영에서 만난 손님들이 도와주었다. 현재 거의 다 완성되었는데, 마지막으로 남은 남산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전문 작가에게 맡길까 한다. 지도가 완성되면 인쇄물을 제작해 비영리적으로 활용할 생각이다.


가게 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나 신념은 무엇인가.

새로운 손님이 많이 오는 가게보다는 재방문하는 손님이 많은 가게가 되고 싶다. 단순히 맛있는 음료와 디저트가 있는 맛집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공간이나 식음료는 평균 이상의 품질을 유지하되, 그 밖에도 손님과의 교감이나 동네의 분위기 등 여러 요소가 모여서 조화로운 가게가 되었으면 좋겠다. 가게에 다녀간 손님들이 남겨 주는 후기 중에서도 특별한 건 없지만 전체적으로 좋다는 평이 가장 기분 좋더라. 그런 식으로 오래도록 이 자리를 지키고자 한다.




처음 가게를 열 당시의 후암동과 지금의 후암동은 꽤 다른 모습일 듯하다. 루프탑 카페나 펍 등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공간들이 들어서면서 서서히 상권이 발달하는 추세다. 이런 후암동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물론 그런 가게들도 필요하다. 새로 생기는 공간들과 오랫동안 있었던 곳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변화의 결과가 어떤 양상으로 드러날지는 모를 일이다. 예를 들어 서촌 같은 경우 새로운 가게가 많이 들어섰지만, 특유의 한갓진 느낌은 여전하다. 그에 반해 익선동이나 삼청동은 상권이 발달하면서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그런 모습을 보면 다음은 후암동 차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최근 후암동에 있던 세탁소 세 곳이 없어졌다. 이런 생활형 가게가 사라지는 것은 일종의 신호다. 물론 이런 변화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가게들이 없어진 자리에 편의점이나 카페 등이 들어서니 누군가는 더욱 편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무턱대고 먼저 생긴 가게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오래된 장소나 사물, 사람을 존중하는 문화가 조금 더 자리 잡았으면 한다.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겠지만, 만일 그 방향이 나와 맞는다면 내가 좋아하는 이 동네에 오래도록 남고 싶다.




에디터

* 편집자: 강필호

조윤

yjo@urbanpl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