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동네 아는강원 1》 미리보기 #1

커피와 맥주 그리고 요동치는 바다

서재우|



파도가 만든 매력의 도시

미국 LA, 인도네시아 발리,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서퍼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본 적이 있다. 그들의 단단한 육체에 끌린 게 아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강인한 정신이, 높은 장벽처럼 밀려오는 파도를 자유자재로 타는 그들의 모습이, 세상의 끝과 마주하는 유일무이한 일처럼 느껴졌다. 파도가 좋으면 파도를 타고, 파도가 없는 날은 바닷가에 모여 파티를 즐기는 그 자유분방함 또한 좋았다. 무엇보다 서핑을 위한 도시에는 응당 커피와 술을 마시거나 음악을 들을 만한 크고 작은 상점이 거리에 줄지어 있어, 언제든지 활력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그런 삶이야말로 이상적인 삶이라 믿었다.

서울에서 그들처럼 사는 게 가능할까? 아쉽게도 불가능하다. 그 삶을 위해선 요동치는 파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핑은 파도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잔잔한 파도 앞에서는 프로 서퍼도 망망대해를 떠도는 작은 아이일 뿐이다. 만약 서울에 서퍼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하늘마저 뚫어버릴 것 같은 기세 좋은 고층 빌딩과 거리의 인파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댈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바다 없는 도시 서울에 서핑 붐이 일었다. 정확히는 ‘서퍼 스타일’ 열풍이다. 2012년 이후부터 발리, 일본의 오키나와, 미국의 하와이 등이 떠오르게 하는 인테리어의 펍이 홍대 인근과 이태원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하와이안 셔츠와 그래픽 요소가 가미된 티셔츠, 보드 쇼츠 등이 여름 패션의 정석이 됐다. 사람들은 서퍼가 만든 패션 브랜드와 그들의 외향적인 이미지를 소비했고, 이는 자연스레 ‘쿨’한 문화로 여겨지며 젊은 세대에게 주목받았다. 특정 장르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경험으로 이어진다. 대한서핑협회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서핑 인구는 2014년 약 4만 명에서 2017년 약 20만 명으로 3년 사이 5배나 증가했다. 이제 서울에서도 서핑을 즐기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자동차로 2시간 정도 달리면 바다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성 글라스하우스


강원도 양양과 고성은 ‘서핑족’이 모여드는 대표적인 장소가 됐다. 부산과 제주도에도 유명한 서핑 장소가 있지만, 그곳까지 가기엔 물리적 거리가 너무 멀다. 그렇게 양양을 필두로 강원도 동해안 바닷가는 한국 서핑의 요충지가 됐다. 서핑의 강점은 지역주의(localism)와 다양한 젊은 문화를 파생한다는 데 있다. 지역주의가 생겨나는 건 파도가 적당한 바다에서만 서핑이 성립되기 때문이고, 다양한 젊은 문화의 파생은 서핑하는 이들이 한데 모여들면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반영한 상업공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렇듯 서핑은 매력적인 도시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강원도도 마찬가지다. 양양군의 하조대・인구・죽도・기사문 해변, 고성군의 천진・삼포・송지호 해변 등 강원도 서핑의 중심지에서 자유로운 서핑 문화와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새로운 상업공간이 생겨나고 있다.



左 포틀랜드 스텀프타운 커피 로스터스

右 고성 문베어브루잉(ⓒ문베어브루잉)


새로운 식음료 문화의 물결

최근 강원도 식음료 문화의 변화와 서핑의 연관성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변화가 서핑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현재 강원도의 핵심 키워드는 감자도 오징어도 옥수수도 아닌, 서핑과 맥주 그리고 커피처럼 특정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자연과 도시가 밀접한 지역의 창의적인 문화를 기업이 아닌 괴짜 같은 사람들이 형성한다는 데 있다. 이는 미국 오리건의 중심 도시 포틀랜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포틀랜드는 어떤 도시인가? 감자가 유명한 서부의 중소 도시다. 한데 2014년을 기점으로 세계에서 가장 ‘힙’한 도시가 됐다. 인터넷에서 포틀랜드를 검색하면, 농산물이 아닌 괴짜들이 이룩한 문화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이를테면 미국 수제 맥주 브루어리의 최대 생산지이자 미국에서 타투 인구 비율이 가장 높고, LGBT(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ed) 운동을 지지하며, 독특한 로컬 커피 브루어리를 갖춘 이색적인 도시다. 이 작은 도시에 어떻게 개성 강한 이들이 몰렸을까? 무엇보다 포틀랜드가 지닌 지역 특수성이 주요했다.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은 도심과 자연의 거리다.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30분 정도만 달리면 대자연이 펼쳐진다. 낚시, 트레일 러닝, 패들링, 캠핑 등 도심에서는 하기 힘든 다양한 활동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이키(Nike)와 컬럼비아(Columbia) 같은 대형 스포츠 브랜드가 이곳에서 시작한 것도, 스포츠 문화의 수도로 자리매김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또한 포틀랜드는 수년간 미국 서부 해안에서 가장 물가가 저렴한 도시였다.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환경, 그리고 낮은 물가에 진취적인 젊은 세대가 매료된 셈이다. 이들은 금융업이나 서비스업보다 좀 더 창의적인 일을 하길 희망해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부 또한 브루어리나 로스터리, 인쇄물 제작처럼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산업을 장려했다. 젊은 세대는 이곳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노력했고, 그 결과 자신만의 신념과 철학을 가지고 ‘크래프트맨십(craftsmanship)’에 기반하여 브랜드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 이 브랜드들의 공통된 특징은 지역에서 태동했으며 독자적인 특수성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모두가 자신들이 몰두하는 맛과 작업을 찾기 때문이다. 

포틀랜드에서 자신의 브랜드를 운영하는 사람들을 취재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당시에 만난 모두가 합심해 말한 것도 ‘지역 중심 커뮤니티’였다. 활발한 크리에이티브 신에 이끌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포틀랜드에 정착한 미국 전역의 아티스트와 메이커는, 기회의 땅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자긍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몰두한다. 이는 파도를 찾아서 특정한 지역에 정착해 생활하는 서퍼의 삶과 굉장히 닮았다. 그리고 하나의 이념 운동처럼 여러 도시에서 발현하고 있다. 



양양 서피비치


한국에서는 강원도 동해안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찾아볼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서퍼에게는 정착지를 가꾸는 재능이 있다. 강원도는 산과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도심과의 소통이 어려워 장년층 인구가 유독 많았다. 그런데 서퍼 같은 특정 집단에게 지리적 고립성은 오히려 강점이 됐다. 포틀랜드에 정착한 젊은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서핑을 통해 강원도에 유입한 젊은 세대 역시 주변 환경을 존중하며 지역 안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에 장인의 자세로 몰두한다. 이들은 바닷가 근처에 서핑 학교와 서핑용품 판매점을 차렸고, 이는 새로운 사람들을 유인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펍, 비스트로, 카페 등이 강원도에 우후죽순으로 생긴 것 또한 자연스러운 변화다.

물론 강릉 카페의 시작점인 보헤미안(BOHEMIAN), 박이추 커피공장과 테라로사(TERAROSA)는 서퍼들이 일군 것이 아니다. 지역의 특징을 활용할 줄 아는 커피 대가가 강원도에 정착해 농부처럼 터를 가꾸듯 일궜다. 강릉은 산과 계곡, 바다가 있으니 자연스레 물이 좋다. 그 덕분에 ‘음료산업’에 강점이 있는 지역이다. 다만 불씨를 일으킬 땔감이 필요했다. 서핑 문화는 충분히 좋은 땔감이 되고 있다. 현재 강원도에서 주목받는 지역인 고성, 양양, 강릉 등은 모두 파도가 좋은 바다를 끼고 성장한 서핑 명소다. 다시 말해 강원도 식음료 문화의 성장은 지역 특징과 서핑 문화가 절묘하게 맞물려 일어난 결과로 볼 수 있다. 맥주는 서핑 문화의 꽃이고, 카페는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트렌디한 장소다. 강원도에 가면 세 가지를 해야 한다. 서핑과 로컬 맥주 체험 그리고 여유롭게 바다를 보며 커피 마시는 일. 촌스럽다고 여긴 강원도가 ‘펑크’한 분위기로 탈바꿈했다. 평범한 산골 마을의 새로운 반전. 지금 강원도의 바닷가는 뜨겁다.



※ 본 콘텐츠는 《아는동네 아는강원 1》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

에디터

* 편집자: 아는동네

서재우

낯선 도시로 여행하는 걸 즐기는데, 다른 세상을 통해서 자신의 가능성을 찾기 위함이다. 그런 마음에서 피처 에디터가 됐고, 현재는 매거진 <B> 에디터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