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바다 곁에서 생업을 잇다

바다가 키운 사람들

고기은|



바다를 곁에 두고 사는 이들에게 바다는 생업의 터전이자 그리움의 근원이다.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온다. 강원도 바다 곁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속초의 배 목수와 삼척의 해녀를 만났다.





목선은 찬란한 과거를 싣고 

목수 진용원


배 만드는 일이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명태와 오징어가 그물 가득 잡히던 그 시절, 속초에는 조선소 열두 곳에 배 목수가 200여 명이나 있었다. 찬란했던 시간이 지나고 이제 더 이상 배를 만들어달라는 사람도, 만들겠다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배 목수 전용원 씨는 평생 함께한 공구를 손에서 쉽사리 놓지 않는다.


언제 속초로 오게 되었나.

부모님 고향이 함경남도 흥남이다. 1・4 후퇴 때 피난 왔는데 도착한 곳이 거제도였다. 나는 거제도 하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그곳에서 배 사업을 하셨다. 속초에 먼저 자리 잡은 아버지 지인이 통일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니 조금이라도 북에서 가까운 곳에 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다섯 살 적에 속초로 오게 됐다. 당시 그렇게 속초에 모여든 실향민이 만든 곳이 아바이마을이다.

 

배 목수가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었나.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는 날엔 아버지에게 도시락을 배달했다. 내가 눈썰미가 좀 있다. 아버지가 일하는 걸 보면서 어깨너머로 배웠다. 그러다 군 복무 중이던 형이 첫 휴가 때 사고로 죽는 바람에 내가 맏이 아닌 맏이가 됐다.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나를 놔주지 않았다. 제대 후 본격적으로 아버지 일을 같이하기 시작했다.


가장 바빴던 때는 언제였나.

본격적으로 배 사업을 시작한 1980년대 초다. 그땐 배를 미처 다 만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 시기에 배가 대형화되면서 10・25・50t급까지도 만들었다. 나는 내가 만든 배 밑바닥에 창호지를 넣어서 종이가 젖으면 돈을 받지 않았다. 배는 한 척이고 선주도 한 명이지만 선원은 네댓 명이있지 않나. 그 배가 고기를 잡아오면 어판장 조합원들과 시장 아줌마들이 돈을 벌 수 있다. 배 한 척으로 숱한 사람이 먹고사는 거다. 그런 책임감으로 배를 만들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부터 FRP(Fiber Reinforced Plastics, 섬유로강화한 플라스틱계 복합 재료) 바람이 불면서 목선사업이 사양길로 들어섰다. 배를 가지고 번 돈을 육지에 투자한 사람은 자식까지 든든하게 살고, 배 만드는 일을 계속한 사람은 망했다. 


그 후로 배 목수들은 어떻게 생계를 이어갔나.

속초에서 일하던 배 목수들은 건축 분야로 많이 나갔다. 배 목수는 절간도 지을 수 있지만 절 짓는 사람은 배를 못 만든다. 그런데요즘은 건축 쪽에서도 일거리가 없어 생활이 어렵다고 들었다.


목선 기술의 명맥을 이을 방법은 없을까.

이제 목선사업은 끝난 것 같다. 바다에서 나는 게 있어야 하는데 요즘은 바다의 씨가 말라서 배를 만들 일도, 고칠 일도 없다. 나 혼자 관광상품으로 생각해둔 것이 있다. 실향민이 속초에 처음 왔을 때 창경배◼를 만들어 미역도 따고 성게, 전복, 해삼도 잡곤 했다. 그 창경배를 만들어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게 하면 좋을 것 같다. 배를 만드는 과정도 구경하고, 옛날에 어땠는지 이야기도 나누면 좋을 텐데. 그런 바람이 있다. 

창경배 물속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창을 낸 배






해녀 바다를 친정 삼은 반백 년

양애옥

  
‘해녀’ 하면 제주도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실은 강원도 바다에도 아주 오래전부터 해녀들이 존재해왔다. 몇 남지 않은 삼척의 육지 해녀 중 한 명인 양애옥 씨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물질을 멈추지 않으리라 힘주어 말했다. 갈남마을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그녀의 이야기를 전한다.  


삼척에 산 지는 얼마나 되었나.

올해 내 나이가 일흔셋이다. 나는 제주 출신으로 여섯 남매 중 맏이로 컸다. 해녀였던 어머니를 따라 물질을 시작했다. 삼척으로 원정 물질을 왔다가 여기 사람을 만나 결혼하면서 이곳에 정착했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무 살이었으니 이제 50년도 넘었다.


당시 제주 해녀들이 삼척으로 원정 물질을 온 이유는 무엇인가.

옛날부터 삼척 미역을 최고로 좋다고 하지 않았나. 워낙 맛있어서 임금님 밥상에도 올라갔다고 한다. 당시 바다에 미역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걸 딸 사람이 부족했다. 그래서 제주 해녀가 많이 올라온 거다. 갈남마을에서도 미역을 캤다 하면 100t은 기본이었다. 문어, 볼락, 우럭, 노래미도 많이 잡았다. 그땐 참 좋았다. 


처음 왔을 때 삼척은 어땠나.

요즘은 강원도가 살기 좋다고 하지만 옛날에는 제일 개발이 안 된 곳이었다. 친정이 종갓집이어서 결혼 전에는 쌀밥을 많이 먹었는데 여기선 쌀이 귀했다. 그래서 보리쌀이랑 강낭콩으로 밥을 지어 먹었다. 칼국수도 해 먹고. 도로 상황도 좋지 않아서 시장에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다. 삼척시장까진 못 가고, 장호1리에서 열리는 오일장에 가서 장을 봤다.


해녀 중 가장 높은 등급인 상군이라 들었다.

한창때는 상군 1등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수심 3~4m밖에 못 들어가지만, 당시엔 8m까지 들어갔다. 우리는 밤낮없이 일한다. 노동 중에서도 상노동이다.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먹고산다고들 한다. 그렇게 40~50년을 고생했으니 이제는 다들 집도 번듯하게 지어 살고 있다.


요즘 갈남마을 해녀들의 사정은 어떤가. 

갈남마을에 남은 해녀는 여섯 명뿐이다. 그래도 삼척시 어촌계 중엔 제일 많은 편이다. 제주에서 온 해녀들은 다 일흔 살이 넘었다. 우리가 앞으로 5년은 더 할 수 있으려나. 새로 물질을 배우는 사람이 없으니 5년 후에는 남은 해녀가 한 명도 없지 않을까 싶다. 요새는 바닷물도 예전 같지 않다. 바다가 오염된 건지 돌도 하얗게 변하고, 생물이 잘 살지 못하는 것 같다. 50년 넘게 해녀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바닷물이 차갑다고 느꼈다. 


본인에게 바다는 어떤 의미인가.

바다는 친정보다 낫다. 노력하면 먹을 것도 나오고 돈도 벌 수 있으니까. 우리 나이에 어디서 받아주겠나. 몸만 건강하면 바다에 들어갈 수 있으니 해녀 일이 그런대로 괜찮다. 난 지금도 바다가 좋다. 바다 냄새도 좋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해녀 일을 계속하고 싶다.

에디터

고기은

여행 칼럼니스트 & 소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