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동네서점 - 서울

3. 기찻길 동네의 변화, 연희와 연남동의 동네서점

구선아|

홍대입구역에서 동교동 방면으로 향하는 곳이 제2의 홍대라고 불리는 연남동이다. 북적대고 화려한 홍대와 달리 연남동은 주택가로 골목길의 정취가 남아 있는 동네다. 골목길 곳곳에 옛 것과 새것이 함께 느껴지는 개성 넘치는 상점이 많다.

중국 화교들이 많이 살고 있어 리틀 차이나타운이라고도 불렸던 연남동은 향미, 하하 등 열댓 개의 중국집이 맛집으로 떠오르며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연남동에서 연희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대로변부터 다니기조차 힘든 좁은 골목길로 이어진다. 규모는 작지만 그들만의 감성이 묻어나는 소규모 카페, 책방, 식당, 작가의 작업실 등이 현재의 독특한 동네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요즘 부쩍 젊은이들이 많아진 연남동과 연희동이 두 번째 여행지다.



연희와 연남동의 동네서점지도 ⓒfunnyplan


헬로 인디북스 Hello Indiebooks

독립출판물 서점 / 서울 마포구 동교로46길 33 / 010-4563-7830 / 수-월 15:00~21:00, 화 휴무


연남동 골목길 산책

지하철 홍대입구역 3번 출구로 나오면 연남동 경의선 숲길이 바로 이어진다. 길의 시작을 알리는 녹슨 철을 이용한 커다란 ‘연남동 경의선 숲길’ 간판은 오래된 철길을 연상시킨다. 연남동 숲길은 1.3km 정도로 홍제천까지 이어져 숲길 곳곳에 실개천이 흘러 걷기에 더없이 좋다.

나는 경의선 숲길을 거닐다 동진시장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동진시장에선 7일마다 아트마켓이 열린다. 아트마켓을 함께 둘러보려면 토요일에, 여유롭게 연남동과 동네서점을 둘러보려면 평일에 찾는 것이 좋다. 동진시장을 통과해 나오면 좁은 골목길이 나타나고, 카레집 히메지와 수제 츄러스집 메르센이 보인다. 따뜻한 츄러스 하나를 입에 물고 골목 모퉁이를 돌면 오래된 건물에 나란히 자리 잡은 작은 서점 두 곳이 보인다. 바로 연남동을 지키는 동네서점 <헬로 인디북스>와 <책방 피노키오>다.



헬로 인디북스 내부 모습


독립출판물의 동아리방

활짝 문을 열고 ‘Hello’ 인사를 건네는 <헬로 인디북스>에 먼저 들어갔다. <헬로 인디북스>는 독립출판물 전문 서점으로 색다른 시각과 소소한 이야기를 다룬 다양한 출판물을 만나볼 수 있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심상치 않은 표지와 제목의 책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입구 면 유리창과 두 면의 벽 그리고 중앙 테이블 모두 독립출판물이 진열되어 있었다. 양쪽 두 면의 벽은 책의 얼굴이 보이게 놓여있다. 왼쪽 벽면엔 단행본 두께의 다양한 분야의 독립출판물이, 오른쪽 노란색 벽면에는 여행과 시집류의 독립출판물이 많았다. 입구 앞 책꽂이와 중앙 테이블에도 역시 다양한 독립출판물이 자연스럽게 꽂혀 있거나 놓여있었다. 크기도 높이도 가지각색이지만 인위적으로 높낮이를 맞추거나 크기를 정렬 해두지 않은 모습이었다.

총서 분류표나 주제에 따라 책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제목을 보고 혹은 개성 있는 표지를 보고 골라보는게 동네서점의 맛이다. 혹시 찾아야하는 책이나 찾아서 보고 싶은 책이 있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인장에게 말을 걸어보자.

“산책론이라는 책 있어요?”

“혹시, 작가 작업노트 같은 책도 있나요?”

“새로 입고 된 책은 뭐에요?”


개떡같이 물어봐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주인장은 신기하게도 내가 원하는 책을 찾아주거나 추천해준다. 만약 찾는 책이 없다면 주문을 부탁할 수도 있다. 이게 동네서점에서 책을 찾는 법이기도 하다. 물론 찾아주거나 추천해 준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책을 더 살펴봐도 된다. 봄 바람과 꽃향기만이 공짜가 아니다. 책 냄새와 책 구경도 공짜니까, 괜찮다.


"봄 바람이 붑니다. 꽃향기가 많습니다. 모두 공짜입니다. "

- 《산책》, 이광호 -


나는 오늘, 봄 바람과 꽃향기와 책 냄새와 책 구경 모두 공짜로 선물 받았다.



헬로 인디북스의 다양한 독립출판물들


진심이 묻은 메모들

이제 조금 더 천천히 서점을 들여다볼까. 발걸음과 시선에 여유를 가지니 책과 책 사이에 붙어있는 따뜻한 메모들이 보였다. 대부분 책 추천과 리뷰에 대한 글인데 일부는 ‘블라, 블라, 블라(BLAH, BLAH, BLAH)’라고 적혀있는 귀여운 메모지에 쓰여 있었고, 어떤 건 빠르고 손쉽게 낙서하 듯 글씨가 적힌 메모도 있었다.

<헬로 인디북스>에선 흥미로운 프로그램 하나를 최근 운영하고 있다. 입고되어 있는 책을 읽고 서평을 적는 모임인 ‘리더스 클럽’이다. 책 사이에 붙어있는 메모들의 연장선상으로 보이기도 했다. 참여자들은 짧은 서평을 달아 놓는데 이번에 그 서평을 모아 소책자로 발간했다.



독립출판물 사이에 붙은 메모들


독립출판물을 사랑하는 <헬로 인디북스>

<헬로 인디북스>의 주인장은 처음엔 독립출판물을 즐겨보는 독자였고, 즐겨 보다 보니 독립출판물을 만드는 사람들이 궁금해져서,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2014년부터 책방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독립출판물의 소개와 판매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만드는지, 어떻게 만드는지, 과정들까지도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할 계획이라는 <헬로 인디북스>는 서점 기능뿐만 아니라 전시, 워크숍, 테마가 있는 영화 관람, 파티 같은 다양한 문화행사를 진행하고 있어 주말에는 책방 앞에서 버스킹이나 다양한 프로젝트 전시를 만날 수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주인장이 말했던 것처럼 <헬로 인디북스>가 독립출판물 제작자는 물론이고 독립출판물을 사랑하는 독자, 미래의 제작자를 꿈꾸는 이들까지 독립출판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면 모두 만나 교감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공간을 꾸민 사람의 마음과 그곳을 채운 개성 넘치는 독립출판물들의 이야기가 있는 <헬로 인디북스>에서 나만의 이야기가 무얼까 생각해보고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었다.



헬로 인디북스 안에서 바라 본 모습





책방 피노키오 Pinokio Books

그림책 서점 /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194-11 / 070-4025-9186 / 매일 13:00~20:00

*2016.7.25 영업 종료, 이전 준비 중


<헬로 인디북스>의 짝꿍, <책방 피노키오>

<헬로 인디북스>의 옆집은 그림책 전문 서점 <책방 피노키오>다. 두 서점이 짝꿍인 냥 바로 붙어있는 모습이다. 크레파스로 손 글씨를 쓴 것 같은 귀여운 서체의 간판과 피노키오 그림이 제일 먼저 손님을 맞이하는 <책방 피노키오>는 그림이 가득 걸려 있고, 그림책 표지가 액자처럼 가득 놓여있다. 마치 갤러리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일러스트, 아트북, 그리고 그래픽 노블에서부터 해외 출판물까지 대형서점에서도 찾기 힘든 다양한 서적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 노란색으로 꾸민 인테리어와 파란색 포인트 컬러가 돋보인다. 그래도 <책방 피노키오>의 매력 지수를 상승시키는 건, 아마도 그림책이 가진 아우라 때문이겠다.



책방 피노키오 입구


그림책의 모든 것

대형 서점도 그림책이나 아트북, 사진책은 속을 들여다볼 수 없게 래핑 되어 있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웬걸. <책방 피노키오>의 모든 책은 비닐로 래핑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게 펼쳐 읽어 볼 수 있다. 값비싼 책도 버젓이 제 속내를 다 보여준다. 아마도 책은 읽어보고 사야 한다는 주인장의 생각이 닿은 운영 방침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사진촬영 금지’를 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동네서점을 찾는 손님들이 SNS에 사진을 올려 입소문이 나야 홍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진짜 책을 보러, 책을 사러 온 사람들에겐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라 시끌벅적하다. 하지만, 오늘은 평일이라 그런지 몇몇 손님이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보고 있어 흡사 동네 도서관 같다. 동네서점이자 동네 도서관이라니. 나도 이 동네 주민이 되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공간이다.

자신에게 이익을 안겨 줄 소비자로서가 아닌, 동네주민으로서 반겨주는 동네서점. 한 분야의 전문서적이나 독립출판물은 일반 책에 비해 시장성, 경제성이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동네서점을 오래오래 운영하기 위해 문화 공간으로서의 새로운 가치 생성과 가치의 공유가 필요하리라 감히 생각해 본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려 그림을 아니 책 표지를 감상해 보자. 책 표지만 구경해도 마구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상상력이 톡톡 튀는 것부터 아련한 색채와 따뜻한 그림이 돋보이는 책 표지까지 참 다양했다. 유난히 디자이너나 일러스트레이터가 <책방 피노키오>의 단골이 많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책방 피노키오에 진열되어 있는 그림책들


피노키오에서만 볼 수 있는 무엇

<책방 피노키오>에서는 종종 원화 전시도 이루어진다. 내가 <책방 피노키오>에 처음 들렀던 지난겨울, 그림책 「별아가씨」의 원화 전시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작가가 2년 동안 색종이를 오리고 접고 붙여 만든 책에 실린 색종이 원화를, 본래의 색감과 형태가 변하지 않는 선에서 색종이 그림을 재현해 선보인 전시였다. 평면인 듯 평면 아닌 그림, 질감과 형상의 테두리가 느껴져 그림에 가까운 조각 같아 보였다.

또한 운이 좋으면 작가의 친필 사인이 있는 책을 구입할 수도 있다. 크리에이티브 한 작업을 하는 이들이라면 일부러 시간을 내어 방문해야 하는 이유가 한가득이다.



진열되어 있는 ‘별 아가씨’ 책


보물창고 같았던 책방과의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3년 전 연남동에 문을 연 그림책 전문서점 <피노키오 책방>.

<피노키오 책방>의 주인장 피노는 책방을 열기로 하고 여러 동네를 돌며 고심하다 연남동에 자리를 잡았다. 주인장 피노는 책방 이름을 지을 때 수없이 고민했다고 한다. 큰 길이 아닌 골목에 자리하고 있어 골목 책방이라 이름을 붙일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강력한 제안으로 본인의 영어 이름을 딴 <피노키오 책방>이 되었다.

피노는 직장생활을 할 때 영어 이름이 필요하여 자신의 성 ‘송’과 같이 소나무라는 뜻을 가진 ‘피노’로 지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피노키오가 너무 유명해서 책방 이름으로 썩 내키지 않았지만, 이제는 자신을 대변하는 이름으로, 그림책 전문 서점의 상징으로 마음에 쏙 들어 한다.

피노가 처음 책방을 열었던 3년 전 연남동과 지금의 연남동은 너무 많이 달라졌다. <피노키오 책방>도 처음엔 누구나 사진도 찍고, 더 자유롭게 책을 구경할 수 있도록 운영했다. 그러나 동네를 찾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책을 관광지 상품 대하듯 하는 방문객도 많아져 책이 상하는 일도 늘었다. 그래도 주인장 피노는 지금도 책을 고르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책을 고르고, 서점에 들여오기 위해 출판사를 알아보고, 직접 저자 사인도 받는 그 자체가 너무 너무 행복해요. 하지만 요즘은 처음 책방을 열었을 때의 설렘과 행복이 점차 줄어들었어요.”


자신이 가졌던 행복의 소멸.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듯한 모습에 피노는 큰 결심을 했다. 처음의 마음가짐으로 완벽히 돌아갈 순 없겠지만, 그때의 행복을 찾기 위해 주인장은 연남동을 떠날 준비 중이다. 어쩌면 서울을 떠나 새로운 도시에서 다시 시작할 지도 모르겠다.


“저도 언젠간 작은 책방을 하고 싶어요.”

“그럼 빨리 시작하세요. 전 지금도 책방을 더 빨리 시작하지 못 한걸 후회해요.”


그 행복해 보이는 주인장의 미소가 연남동이 아닌 다른 동네에서라도 오래오래 지속했으면 좋겠다.



책방 피노키오와 주인장 피노


* 책방 피노키오는 7월 25일 문을 닫았습니다. 다시 책방을 열기 전까지 온라인을 통해 소통합니다.




책바 Chaegbar

술이 있는 서점 / 서울 서대문구 연희맛로 24 1F 101호 / 02-6449-5858 / 월-목 19:00-25:30, 금-토 19:00-27:00, 일 휴무


<책바>에 가다

오늘의 마지막 여행지는 책과 술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바(Bar)이자 동시에 심야 서점인 <책바>다. 하루 온종일 걸어 다닌지라 마을버스를 탈까 고민했지만, 아직 영업시작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천천히 걸어갔다.

두세 블록 걸어오다 사러가 쇼핑센터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오면 된다. 부동산 사이의 골목 안으로 들어오다 보면 <책바> 간판이 보인다. <책바>는 계단에 가려진 채 건물 깊숙한 곳에 아늑히 자리 잡고 있다. 판화가 ‘모르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그림에서 본 듯한 계단 아래 있다.



책바 입구


책과 술이 있는 공간에서 꿈지럭대기

<책바>의 유리문을 여니 제일 먼저 책이 놓여있는 테이블 너머 바(bar)가 보였다. 바다 건너 각국에서 왔을 예쁜 술병들이 무심히 놓여있었다. 술과 책이라니, 이것만으로도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안으로 들어서니 서점이라기엔 조도가 낮았다. 그래서 더욱 차분해지기도 했다. 술이 술술, 책이 술술 들어갈 분위기다.

입구 오른쪽엔 큼직한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빌보드 차트’가 있었다. 술이 우리의 감성과 예술성에 힘을 준다고 믿는다는 주인장이 <책바>에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일정한 주제에 따라 짧은 글을 쓰도록 요청하여 받은 글을 모아둔 곳이다. 다른 손님들의 투표로 반응이 가장 좋은 몇 작품을 쓴 이들에게 술 한 잔을 선물로 주는 재밌는 차트였다.

이번 주제는 ‘취향’ 이었다. 스무 개의 취향과 관련된 글이 붙어있었다. 나는 ‘취향이 자꾸 바뀌는 게 내 취향.’ 이라는 글에 소심하게 투표를 했다. 취향보다는 유행에 민감한 사회가 돼 버렸지만 자신의 취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 같아 재밌었다. 무엇보다 ‘빌보드 차트’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흥미로웠다.

‘빌보드 차트’ 아래에는 독립출판물이 가지런히 온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샘플을 꽂아 두어 손님들이 편하게 펼쳐보고 구매할 수 있도록 배려된 것이다. 독립출판물에 관심 있던 독자는 한 번은 들어봤을 책이 많았다. 「9여친 2집」과 「꽃같거나 좆같거나」 그리고 「비정기간행물 사표」와 「일개미 자서전」도 있었다. 나는 「일개미 자서전」을 집어 들었다. 이제껏 일개미라면 어디 내놓아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나였다. 필명일 것이라 예상되는 ‘구달’이라는 작가 이름도 마음에 쏙 들었다. 더군다나 내가 좋아하는 ‘알베르 카뮈’의 시크 한 문장으로 이 책은 시작하고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뭘 하지?”

“꿈지럭대는 거지, 꿈지럭대는 거라구.”


한참동안 책을 들여다보다 나도 다시 꿈지럭댔다. 아담한 공간을 효율적으로 구분한 주인장의 센스 덕분에 아주 조금 꿈지럭대도 전혀 느낌이 다른 책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 중 하나는 ‘대여가 가능한 책’ 이었다. 음료 팔레트를 사용하여 훌륭한 책꽂이를 만들어 냈다. 보증금 만원을 내면 원하는 책을 빌려갈 수 있고, 한 달 내에 반납하면 보증금을 돌려주는 무료 대여 서비스다. 윤동주 시인 시집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김연수 작가의 단편소설집과 세계고전문학전집 책 몇 권도 보였다.

그 건너에는 ‘술이 등장하는 책’과 ‘술이 땡기는 책’이라 명명한 책들도 있었다. 책을 보면 작가나 소설 구절에 나오는 술들이 있다. 책을 보면서 책에 나오는 술을 같이 마시면 책 속에서 술을 마시던 그처럼 혹은 그녀처럼 그 상황에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인간실격」과 「달과 6펜스」에는 ‘압생트(Absente)’,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는 ‘보드카 토닉(Vodka Tonic)’이 그리고 「스푸트니크의 여인」에는 ‘캐나디언 클럽(Canadian Club)’이 등장하였다는 글귀와 등장한 술병이 함께 멋들어지게 진열 되어 있었다. 이 술 한잔과 함께 이 책들을 다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바에 진열되어 있는 책들


비밀의 방과 책바 메뉴얼

이제 자리에 앉아 꿈지럭 될 시간이다. 이곳에서 작은 모임이 있었기에 주인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여쭈었다. 원래 <책바> 규정상 네 명 이상은 함께 앉을 좌석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책 관련 모임으로 조용히 책 이야기만 한다는 굳건한 약속 끝에 나는 비밀의 문을 지날 수 있었다. 버튼을 누르니 책장에 숨겨진 비밀의 문이 나오고, 바 앞이 드러났다. 그리고 비밀의 방이 나왔다.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


정현종 시인의 시구를 뒤로 하고 비밀의 방으로 향했다. 비밀의 방은 마치 동굴 속 아지트 같았다. 어른들 몰래 숨죽여 만든 아이들의 다락방 같기도 했다. 어떤 글이든 쭉쭉 뽑아 써질 것만 같은 책상을 눈앞에 둔 구석에 앉은 나는, 이 공간에 놓인 모든 사물을 한참동안 눈으로 들이켰다.



정현종 시인의 시구가 쓰인 칠판과 비밀의 문


하지만, 일주일째 고생중인 이 지독한 감기는 나에게 여유로운 시간을 쥐어 주지 않았다. 쫓겨나지 않은 게 다행일정도로 기침을 해댔다. 막힌 공간인데다가, 아무래도 하루 종일 여행하다 살짝 피곤해진 밤이 되어서 기침이 심해진 모양이었다. 죽을 만큼 기침을 하면서도 메뉴판의 글자는 꼼꼼히 읽어나갔다. 메뉴판이라기보다는 <책바>의 매뉴얼 북 같았고, 수수께끼 책 같기도 했다.

‘책바 매뉴얼’로 시작한 이 얇은 ‘메뉴얼’은 ‘01 책 속의 그 술’과 ‘02 시’, ‘03 에세이’, ‘04 소설’, ‘05 계간지’ 그리고 ‘06 별책부록 & 양장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책 속의 그 술 페이지에는 밖에서 보았던 ‘술이 등장하는 책’의 책과 술이 있었고, 다른 페이지도 각 타이틀에 걸 맞는 책과 그 책에 어울리는 술이 짝지어져 있었다. 술과 책에 관한 독립출판물이라 해도 괜찮을 만한 ‘메뉴얼’이었다.


‘나는 책을 골라야 하는 걸까, 술을 골라야 하는 것일까.’


약도 맛없는 건 싫은 나이기에 평소 맛이 좋아 즐겨먹는 깔루아 밀크를 골랐다. 따뜻한 물 한잔을 부탁하고 잠시 바깥 공기를 쐬러 나갔다 온 사이, 주인장은 물 한잔과 함께 목 아플 때 먹는 캔디 한 알을 자리에 두고 간 후였다. 감동에 겨워 두 손이 저절로 모아졌다. 그 사이, 주인장이 다시 비밀의 방에 모습을 내비췄다.


“감기가 심하시면 뱅쇼가 더 좋지 않을까요?”

“뱅쇼가 있었나요? 저 뱅쇼 좋아해요. 뱅쇼로 주세요.”


계피와 사과를 사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수고를 기꺼이 할 정도로 뱅쇼를 좋아하는 나다.



비밀의 방에 놓인 책상


반복될 것만 같은 여행

짧은 모임을 마치고 이제는 집에 돌아갈 시간. 아쉬운 마음에 종종 걸음으로 다시 <책바>를 둘러보았다. 바에는 대부분 혼자 온 손님이 많았고, 남자 손님보다는 여자 손님이 많았다. 보통 이른 시각에는 여자 손님이 많고, 늦은 시각에는 남자 손님이 많다고 한다. ‘책’이라는 물성과 ‘바’라는 공간성 때문인 듯싶었다. 그리고 모든 손님이 한 권씩을 손에 끼고 앉아 있었다.

밤은 깊었고, 술은 삼키었고, 대화는 깊은 이 시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고 있는 펼쳐진 책만큼이나 이 공간의 시간은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지 않고 시계추처럼 천천히 반복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책바의 술과 책





어반플레이 urban play

카페, 복합문화공간 /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27길 52 / 070-7619-7337 / 매일 13:00-21:30


‘어반플레이’와 <어반플레이>

연희동에 오는 이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곳이 있다. 내가 연희동에 오는 날엔 꼭 들리는 곳, 도시문화콘텐츠 창작 그룹 ‘어반플레이’가 운영하는 동명의 복합문화공간 <어반플레이>이다.

<어반플레이>는 <책바>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조용한 주택가라 걸어오고 가기 좋고, 밤 9시 너머까지 운영되니 선선한 바람이 부는 시간에 들리면 좋다. 레벨 차가 있는 낮은 언덕에 위치한 주택을 개조하여 지하 1층에서 지상 2층의 공간을 재미있게 구성하였다.

길과 길이 맞닿는 모서리에 대문이 나 있다. 모서리 대문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면 작은 마당과 카페 그리고 작은 전시공간이 있는 ‘cultural space’가 1층에 있다. 지하 1층 ‘exhibition’에는 전시장, 2층 ‘urban play’엔 복합 공간과 사무실이 있다.

<어반플레이>는 테이블과 의자 등 가구가 작가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좌석마다 테이블과 의자 디자인이 다르다. 어느 소품 하나 허투루 진열하지 않아 어디에 앉을지 한참을 고민하게 한다. 자리를 잡고, 에이드나 주스를 주문하면 메뉴에 맞는 꽃이 음료 위에 띄워져 나온다. 예쁜 에이드 색이 더 예쁘게 빛나고, 달달한 주스가 더 달달해지는 느낌이다. 너무 예뻐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또한 날씨가 좋은 날은 마당에 테이블이 펼쳐져 감나무 아래서 따뜻한 햇볕과 바람을 즐길 수 있다.

지하 1층은 내려가는 계단부터 예사롭지 않다. 계단 천정은 철골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콘크리트는 부서져 양 옆이 매끄럽지 않다. 벽과 바닥의 거친 질감을 그대로 두어 날것의 에너지를 붙잡아 두고 있었다. 아주 작은 룸과 오밀조밀 한 복도로 구성 되어 있어 실험적인 전시나 오브제 전시를 하기 알맞아 보였다. 대중목욕탕에서 볼 수 있을법한 타일과 그대로 드러난 노출 콘크리트가 1.2층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이었다. 전시를 할 수 있는 룸마다 레벨 차가 있고, 콘크리트 벽으로 구획되어 있어 신선한 느낌을 준다.

2층은 사무실 외 공간은 전시공간으로 사용한다. 얼마 전 ‘연희, 걷다. 공예, 있다’ 에서는 아티스트의 작품을 판매하고, 오브제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쓰였다. 2층 테라스는 어느 연희동 카페나 건물의 옥상 남부럽지 않은 분위기를 가졌다. 높은 담, 예쁜 주택들이 빼곡한 연희동이 한 눈에 보이고, 데크와 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멋스럽게 놓여있으며, 바깥을 향하고 앉는 바와 의자는 밤이건 낮이건 분위기를 한껏 돋아준다.



어반플레이의 전경


새로운 도시문화를 만든다

<어반플레이>를 운영하는 어반플레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도시 속 사회적 이슈를 해결하고, 감성 문화도시를 디자인하는 것이 목표다. 많은 사람이 쉽게 도시에서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콘텐츠 창작 그룹이 운영하는 덕분에 <어반플레이>에선 다양한 전시와 문화예술프로그램이 항상 열린다.

앞서도 언급했던 ‘연희, 걷다. 공예, 있다(16.4.22~5.08)’ 는 공예작가 34명의 작품 전시와 공예 체험, 연희동 마을 스토리 투어가 진행되었고, 연희동 일대 문화 공간 10곳과 연희동 주민센터가 참여한 프로그램도 개최됐다. 나도 전시도 보고, 연희동 투어도 할 겸 방문했었다.

지금은 여행을 꿈꾸는 이들의 취향저격 프로그램 ‘Travel Ground (16.6.26~7.10)’을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여행과 관련된 공간, 도시, 경험을 공유하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을 예비 여행가에게 제공하는 프로그램으로 여행 작가와 사진가, 여행전문가를 직접 만날 수도 있다고 한다. 관련 전시와 토크 콘서트, 오프닝 공연 등은 모두 <어반플레이>에서 진행된다. 여름이 시작되는 그날,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 <어반플레이>에 모여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길 바란다.



어반플레이의 네트워킹 파티





*「여행자의 동네서점」은 해피빈 공감펀딩(2016.7.13~8.22)을 통해 모금 된 금액으로 책자와 전자책, 여행자의 동네서점 서울지도를 제작하였습니다. 어반폴리에 연재되는 내용은 「여행자의 동네서점」 책자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일부 동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행자의 동네서점 - 서울' 연재글 리스트

1. 여행자의 동네서점 INTRO
2. 시간의 겹이 쌓인 동네, 서촌의 동네서점
3. 기찻길 동네의 변화, 연희와 연남동의 동네서점 (현재글) 
4. 트랜드 한 디자인의 집합지, 잔다리길의 동네서점
5. 음악이 있는 서점 프렌테 & 시 전문서점 위트 앤 시니컬
6. 텍스트가 살아 있는 곳, 문래동의 동네서점
7. 청춘의 문화와 예술, 대학로의 동네서점
8. 오르락내리락 언덕 동네, 해방촌의 동네서점
9. 추리소설 전문서점, 미스터리 유니온 


에디터

* 편집자: 박혜주

구선아

동네서점을 만나는 즐거움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