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동네서점 - 서울

4. 트랜드 한 디자인의 집합지, 잔다리길의 동네서점

구선아|

잔다리란 ‘작은 다리’를 뜻하는 우리 옛말로 현재 서교동 일대를 일컫는 이름이다. 예전 이곳엔 두 개의 작은 다리가 있었다. 서교예술실험센터 근처에 하나, 망원동길과 동교동길 사이의 복개도로 오른쪽에 하나 있었다고 한다. 서쪽 잔다리가 있어서 서교동, 동쪽 잔다리가 있어 동교동 이렇게 두 동네를 구분해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 잔다리길은 홍대 앞에서 양화로로 이어지는 길로 서교동 와우산길에서 성산동 망원동 길에 이르는 폭 20미터, 길이 1,350미터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1980년대만 해도 잔다리길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지금처럼 유행을 끄는 상점은커녕 인적이 드문 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잔다리길은 피카소거리와 겹쳐지고, 상상마당에 이르기까지 이국적인 카페, 바, 상업적인 시설들이 화려하게 수 놓인 거리로 자리 잡았다. 이 길 구석구석의 아티스트 편집숍과 서점이 유행을 선도하는 한편 실험적인 홍대 앞 특유의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잔다리길의 동네서점지도 ⓒfunnyplan


북새통문고 Booksaetong

만화서점 / 서울 마포구 홍익로6길 57 금강빌딩 B1 / 070-7519-2008 / 월-금 9:00-22:00, 토-일 11:00-22:00


만화서점이라는 신세계

서울에 살면서 혹은 서울에 여행을 와서 홍대 거리에 오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젊은 세대에겐 빼놓으면 섭섭한 장소다.

나도 서울에 살며 참 많이도 홍대 거리를 드나들었다. 하지만 홍대입구역을 거점으로 이렇게 많은 서점들이 밀집해 있는지 알지 못 했다. 지하철 입·출구와 연계된 여행서점 <짐프리>를 비롯해 만화 전문서점 <북새통문고>와 <한양툰크>, 디자인 전문 서점 <아이디엔북>과 30년 넘게 홍대를 지키고 있는 <온고당>, 잔다리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잡지 전문서점 <매거진랜드>와 갤러리가 있는 <땡스북스> 등 서울에서 가장 많은 동네서점이 밀집해 있다.

오늘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점을 여행하기로 했다. 홍대입구역에 도착해 지하철 역사에서 가까운 만화서점 <북새통문고>로 향했다. 파란색 간판이 큰길가에서도 또렷이 보이는 곳이다. 간판 아래로 한 사람이 내려가기 딱 좋은 좁은 계단이 이어져 있다. 계단 양 벽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만화 포스터가 붙어 있어 서점의 정체성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서점 문을 열자마자 예상치 못한 큰 규모에 놀랐다. 만화 전문 서점이라 해서 막연히 학창시절 드나들었던 만화방 또는 책 대여점 크기 정도로 생각했는데, 대형서점 못지않은 규모에 놀라웠다. <북새통문고>는 건물의 지하 1층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계산대를 중심으로 열 개의 종 통로와 두 개의 횡 통로가 있을 만큼 컸다.



어마 어마 한 규모의 북새통문고


큰 규모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양의 책이 빽빽이 꽂혀있어 압도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기둥과 책장마다 알파벳과 주요 출판사별로 책이 분류되어 있었고, 만화책과 그림책 외에 에세이, 웹툰, 그래픽 노블, 사진집, 컬러링북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텍스트보다 그림이 중심이 되는 세상의 모든 책이 이 안에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책을 찾지? 제목만 대충 훑어도 한 나절이겠는 걸.’

걱정도 잠시. 동네서점을 여행하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검색대’가 떡 하니 있는 게 아닌가.

‘이곳, 어마어마한 곳이다.’



단행본 만화책이 가득 쌓여 있는 모습


아지트 같은 <북새통문고>

초등학생 시절의 나는, 매월 발행되는 만화잡지 「챔프」와 「점프」를 받아 보는 게 큰 낙이었다. 그중 「슬램덩크」나 「드래곤볼」, 「란마 1/2」은 단행본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용돈을 모았다. 그렇게 중학생이 되었고, 본격적으로 만화책을 즐겨 봤다. 매일 새로운 만화책을 빌려 학교에서 친구들과 돌려보는 맛이 여간 달콤한 게 아니었다. 때로는 선생님 몰래 수업시간에 만화책을 보다 뺏기기도 하고, 만화책을 보려고 쉬는 시간만 기다리기도 했다. 학교를 마치면 당연히 만화책 대여점으로 향했다. 마치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과 같았다. 책방에 들려 만화책을 반납하고 대여하는 시간조차도 즐거웠던 기억이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소설 위주로 책을 읽게 되고, 대학교에 진학하며 전공서적과 씨름하며, 그 이후에는 점점 만화책과는 멀어졌다. 사회에 나와서는 혹시 아이디어를 찾을까 하여, 어디 써먹을 게 있을까 하여, 목적을 가지고, 자료 삼아 만화책을 보는 정도였다.

<북새통문고> 서가엔 학창시절 보았던 만화책들도 간간이 꽂혀있고, 그 시절이었으면 몽땅 사버렸을 만한 책도 한가득이었다. 오랜만에 만화서점에 와서 그때 그 시절 감성이 되살아난 것 같았다. 서점엔 한창 만화책 좋아할 교복 입은 학생들과 앳된 얼굴의 젊은 손님들이 주를 이뤘지만, 사이사이 내 또래나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학창시절 추억에 빠져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북새통문고>은 어마어마한 양의 책 말고도 관련 퍼즐과 피규어, 문구류도 판매하고 있었다. 마니아라면 책만으로는 부족한 것은 당연, 책을 사며 부록처럼 살만한 엠디 상품들도 책장 사이사이, 기둥 사이사이에 놓여 누군가의 지갑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픽 노블부터 해외 서적까지 다양한 책이 구비되어 있는 북새통 문고





한양툰크 Hanyangtoonk


만화서점 / 서울 마포구 홍익로6길 67 B1, 1F / 02-338-5210 / 매일 9:30-23:00


뽑기의 추억

<북새통문고>와 마주하고 있는 <한양툰크>로 걸음을 옮겼다. 길 하나를 건너 비스듬히 꺾어진 골목을 들여다보면 큼지막한 간판의 <한양툰크>가 보인다.

제일 먼저 날 반긴 건 문 밖에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뽑기 기계였다. 월간 만화잡지를 기다리던 초등학생 때 보다 더 어린 코흘리개 시절, 백 원짜리 뽑기 하나면 마냥 행복했던 때가 있었다. 갖고 싶은 무엇이 나올 때까지 백 원, 이백 원, 삼백 원을 넣었다. 드르륵 태엽이 돌아가고, 철커덕 뚜껑이 열리며, 데구루루 동그란 뽑기 알이 나올 때면 얼마나 설레던지. 동전 쓸 일이 없는 요즘, 지갑에 잠자고 있던 동전을 꺼내 제일 마음에 드는 캐릭터 뽑기 기계 앞에 섰다.

‘제발, 제발, 제발.’

그때나 지금이나 기다리는 마음은 똑같았다. 원하는 게 나올 확률도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던 걸까. 역시나 갖고 싶은 캐릭터는 한 번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쭈그리고 앉아 뽑기 기계 속을 들여다보고, 동전을 넣고, 태엽 소리를 듣는 건 그 시절 보다 설레었다.



뽑기 기계가 놓인 한양툰크 입구


<한양툰크>의 전면 유리창은 빛 한줄기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만화책 포스터와 책 관련 행사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활짝 열린 문을 들어서니 <북새통문고> 보다는 조금 작아 보였지만, 책의 양은 그에 견주어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사방이 바닥부터 천정까지 레일이 달린 이중 책장으로 되어 있고, 손가락이 들어갈 틈도 없이 빼곡하게 책들이 꽂혀있었다.

책장은 순정만화, 청소년 만화, 성인만화 등으로 구분되어 있고, 다시 출판사와 시리즈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책장 외에도 열 개가 넘는 매대에 책이 드높이 쌓여있는데 매대에는 만화책 외에 잡지, 에세이, 그림책은 물론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 베스트셀러 소설이나 수필집도 보였고, 윤태호의 「미생」, 순끼의 「치즈 인 더 트랩」 같이 드라마로 제작되며 이슈화 된 웹툰도 많았다. 특히 최근 이슈화된 웹툰과 그래픽 노블 책들을 입구 쪽에 따로 모아두어 찾기 쉽고 보기도 편해 좋았다. 책의 얼굴이 보이게 진열되어 있어 몰랐던 책도 흥미가 생겨 들추어 보기 좋게 비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하 1층에는 원서들이 가득했다. 캐릭터 상품부터 최대 보유량을 자랑하는 일본 원서 코믹스와 유럽만화, 대형 화보집까지, 마치 보물창고 같았다. 책의 얼굴이 드러나 있어 1층보다 알록달록한 느낌이었고, 책들이 조금 더 여유롭게 진열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서 본 한양툰크 서가 모습


추억을 부르는 만화서점

만화서점 두 곳을 둘러보는 동안, 나는 잊고 있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너무나도 행복했던 시간, 되돌아보면 웃음 짓게 하는 시간이었지만 완전하게 잊고 있던 시간이기도 했다. 어느 노랫말 가사처럼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므로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돌이켜보니 꽤 오랜 시간 이렇게 살아온 듯싶어 씁쓸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때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은 만화책보다는 다른 책들을 즐기고 좋아하지만 그때는 어려서, 지금은 어른이라서 달라진 건 아니다.



만화책을 고르고 있는 손님


가끔 생각한다.

사실 성장이라는 것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대신 위장술을 익혀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욕망을 숨기고, 유치함을 숨기고, 정상적인 어른이 되었다고.

약간의 매너로 모두가 모두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 《익숙한 새벽 세시》, 오지은 –


책보다 더 값진 시간을 내게 준 만화서점 두 곳. 아, 역시 여행의 거리와 여행에서 오는 인사이트는 비례하지 않는가 보다.





아이디엔북 IDNbook

해외출판물서점 / 서울 마포구 어울마당로 136-3 / 02-334-8556 / 매일 10:00-22:00


디자이너들이여 오라

<한양툰크>에서 1분 거리에 또 다른 전문서점이 자리하고 있다. 만화서점은 아니지만, 이곳 역시 시각 중심의 책을 판매한다. 바로 해외 출판물 전문서점 <아이디엔북>이다. <아이디엔북>은 온라인에 정보가 많이 노출되어 있지 않아 여행을 망설였던 곳이다. 하지만, 주인장이 건축 디자이너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와보고 싶던 서점이었다. <아이디엔북>은 단골들이 꽤 있는 디자인·패션, 건축· 인테리어, 미술·사진 책을 주로 판매하는 서점이다. 국내에서는 구하기 힘든 희귀한 책과 해외 직수입 잡지, 과월 호를 이 서점에서는 찾을 수 있다. 또 해외 책 수입 대행은 물론 해외 잡지의 정기구독도 대행해 주고 있다.



아이디엔북 입구 모습


서점은 입구 앞부터 심상치 않았다. 디자인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샀을 법한 「Wallpaper」와 「Ideal Home」, 「HOMES&GARDENS」, 「ESPRIT」 등 과월 호 잡지가 클래식한 의자를 뒤로하고 테이블과 스탠드 책꽂이에 색 바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감각적인 표지로 자신을 맘껏 뽐내고 있는 물 건너온 잡지들이 한가득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domus」와 「GRAFIK」, 「arts」가 전면에 비치되어 있어 취향 저격 당한 기분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작은 규모지만 서점 내부는 참 알차게도 여러 집기로 다양한 구획으로 나누어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많은 책이 비치되어 있었다.

판매하는 책이, 책등에 쓰인 책 제목보다는 표지나 디자인, 책의 정체성을 대변해 줄 무엇이 잘 드러나야 하는 분야의 책들이기에 최대한 책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건축 디자이너 출신 주인장의 어쩌면 당연한 책 디스플레이 방식이었다. 이중으로 삼중으로 겹겹이 세워지고, 바닥부터 천정까지 예쁘게 놓여 있는 책들이 욕심났다.

소중하지 않은 책이 어디 있겠냐만 희귀하고 고가의 책이 많다 보니 과월호를 뺀 모든 책이 비닐로 쌓여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책에 관심이 있는 손님은 주인장에게 말하면 책 속을 살펴볼 수도 있으니 이점 염두 해 두자.



아이디엔북 입구에 놓인 과월호들


이곳엔 아이디어가 있다

건축과 미술을 공부하던 꿈 많고 욕심 많던 대학시절, 학교로 한 달에 한 번 책 아저씨가 방문했다. 책 아저씨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빼먹지 않고 참으로 열심히도 오셨다. 수 십 권의 무거운 건축과 디자인 책을 작은 손 끌개에 짊어지고 건물 꼭대기 층 연구실을 찾으셨다. 가득 쌓아 가져온 책들은 대부분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책이었다.

“건축하는 학생이라면 이런 책 한 세트는 있어야지.”

책 아저씨의 현란한 말솜씨에 홀딱 넘어가 당시 오십만 원이 넘는 해외 현대건축가 작품집 세트를 덜컥 구매했더랬다. 지금도 사고 싶다고 고민 없이 살만한 가격은 아니다. 그런데 십수 년 전 대학생 시절이었으니. 사고 나서 오랫동안 후회로 끙끙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년간의 기숙사, 자취생활을 하며 몇 번의 이사 끝에 지금 집에 남아 있는 책은 일곱 권이 채 안되지만 말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작품 과제나 리포트를 쓸 때 네이버나 구글 검색으로 자료를 수집하지만, 스마트폰은커녕 인터넷도 자유롭지 않던 그 시절엔 해외 출판물이 가장 트랜디 하고 희소성 있는 정보를 얻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온라인 서점도 없던 때라 책 아저씨를 통해 얻는 자료가 매우 귀중했다. 그땐 작품집 세트를 가지고 있으면 나의 실력도 쑥 성장할 것만 같았다. 사실 값비싼 작품집 세트를 사고 나서 건축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아이디엔북>에 오니 견물생심이라고 눈으로 보니 갖고 싶은 책이 한두 권이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책을 소유하면 책 속 지식이나 디자인 해법도 소유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은 그대로였다.



해외 잡지와 서적들이 가득한 아이디엔북


갖고 싶은 책이 한가득이었지만, 이제는 나도 책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가격도 만만치 않고 오늘 여행을 계속하기엔 무게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새로운 디자인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아이디엔북>에 다시 방문해야겠다. 풀리지 않는 물음표의 답이 왠지 이곳에서 찾아질 것만 같다.





1984

커피와 차가 있는 서점 / 서울 마포구 동교로 194 혜원빌딩 1F / 02-325-1984 / 매일 11:00-23:00


여기, 서점 맞나요

만화서점과 해외출판물서점을 뒤로하고 큰길을 건넜다. 200m 정도 걸으면 소란스럽지 않은 뒷골목이 나온다. 그 뒷골목에 청량한 느낌의 잔디마당을 가진 <1984>가 있다. ‘책은 문화의 뿌리이자 그 결과이다.’라는 큰 세움 간판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청량한 느낌의 잔디를 가진 1984


<1984>에 들어섰을 땐 책이 너무 적어 이곳이 서점인가 싶었다. 서점이라기보단 책이 있는 카페, 책을 파는 아트숍처럼 보였다. 엽서, 브로치, 수공예 지갑과 문구류, 유기농 화장품 외에 모자와 의류가 책만큼 차지하고 있어서일까. 책을 위한 공간은 유리창 앞에 놓인 책장과 책이 촘촘히 꽂혀있는 책 매대, 아트상품과 함께 놓인 또 다른 책 매대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책의 양이 아닌 책에 집중하니 적은 숫자지만 책 한 종도 고심 끝에 선택한 듯 보였다. 책 한 권도 소중히 비치되어 있었다. 모든 책은 내용을 볼 수 있게 샘플도 갖춰져 있었다. 독자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운영하는 <1984>는 서점과 카페, 편집숍 그리고 전시공간이 결합한 형태다. 책과 관련된 전시와 워크숍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1984>는 전혀 기능이 다른 공간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있지만 이질감 없이 조화로운 복합문화공간인 것이다.

비치된 책은 독립출판 잡지와 소설, 수필이 많았다. 그리고 장소적 특성상 디자인 관련 서적도 많이 눈에 띄었으며, <1984>서 출간한 책도 있었다. <1984>는 1951년 설립한 희망사, 1977년에 설립한 혜원 출판사의 뒤를 이어 「예술가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패션북」, 「남자의 기술」 등을 출간한 3세대 출판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책을 고르는데 더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아트숍과 작은 서점이 결합 된 모습의 1984


책 한잔 주세요

<1984> 중앙에는 아일랜드 스타일형태의 주문대가 놓여 있다. 한쪽은 카페의 결재 기능을, 다른 한쪽은 책과 아트상품을 결재하도록 나뉘어 있었다. 음료와 간단한 먹을거리를 즐기기 위해 카페 주문대로 이동했다. 그런데 주문대 위에 책 한권이 보였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 아메리카노 = 10,000’

책 한 권과 아메리카노 한 잔을 세트로 엮은 메뉴라니. 그것도 책 한 권 가격에 커피까지. 나는 고민 없이 세트를 주문했다. 어디에 앉아야 이곳에서의 시간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지 좌석을 두 번이나 옮겨서야 투명 유리컵에 예쁜 꽃이 꽂힌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따뜻한 커피 한 잔과 김소월의 진달래꽃 한정판이 내 자리로 서빙됐다. 제값을 치렀는데도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이 세트 메뉴 아이디어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며 책을 들추었다. 잠시 허기진 책욕과 식욕을 채우고 나서야 <1984>의 구석구석에 시선을 던졌다.

‘1984가 무슨 뜻일까. 조지 오웰의 1984인가?’

이 공간 이름이 지닌 의미가 궁금해졌다. <1984>가 당연히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을 선망하여 지은 이름이라 추측했던 나였다. 포털 사이트에선 주인장의 출생연도와 밀접한 관계라는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1984가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의 시작이 아니라, 새로운 복합 문화의 유토피아가 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지었던 것일까.



선택 된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 서가


뮤지엄을 벗어난 전시

끝없이 반복되는 영상이 나오는 스크린과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작은 전시공간이 내 눈길을 끌었다. 스크린에서는 한 남자의 모노드라마 같은 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고, <1984> 공간에 흐르는 음악이 영상 속 배경음악처럼 들렸다. 영상은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하얀 방에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방에 들어온 남자는 담배 한 개비 한 개비에 정성스레 불을 붙이고 캔버스에 올려놓는다. 담배는 스스로 몸을 태워 옅은 불빛을 발아하고, 캔버스는 그 흔적을 고스란히 담는다. 안도현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


이내 영상 속 작품을 찾아냈다. 카페 벽에 나란히 그 작품이 걸려있었다. 작품이 제작되는 과정과 함께 보니, 작품과 부쩍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작품 영상


투명한 유리 벽으로 구획한 작은 전시공간에서는 ‘신모래’ 작가의 쇼케이스가 전시 형태를 빌어 진행 중이었다. 핑크빛 네온사인이 유리벽에 비추어 반사되며 서점에 들른 손님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주문한 음료를 기다리거나 무언가를 구매한 손님들은 자연스레 전시공간을 둘러보는 모습이다. 전시는 한 남자, 한 여자의 사소한 일상을 담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컬러의 일러스트 그림 몇 점과 아트북, 페이퍼백, 엽서가 전시되어 있었다.


오늘도 현재진행 중

전시와 카페가 결합되거나 음료와 책을 함께 파는 서점이 이제 흔해졌지만, <1984>처럼 나열식이 아닌 복합적인 기능들을 꽤 세련된 디자인으로 자연스럽게 융합한 공간은 흔치 않다. 복합문화공간 <1984>는 오늘도 성장 중이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낡은 건물 사이로 고양이가 슬금슬금 걸어 나오고, 손에 가방을 든 직장인들이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책 읽기 딱 좋은 어슴푸레한 시간이다.





땡스북스 THANKSBOOKS

전시가 있는 서점 / 서울 마포구 잔다리로 28 더갤러리 1F / 02-325-0321 / 매일 12:00-21:30, 매달 마지막 주 월 휴무


어서오세요, 땡스북스입니다

잔다리길을 거슬러 올라 오늘의 마지막 서점을 찾았다. 책방 좀 다녀봤다 하는 사람은 한 번쯤 가봤을 <땡스북스>다. <땡스북스>는 홍대입구역과 합정역 사이, 상상마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길목에 들어서면, <땡스북스> 의 상징인 노란 간판이 또렷이 보인다.

전면 유리창으로 보이는 수많은 책과 따뜻한 노란 불빛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유리창 밖에서 본다면 서점인지 커피집인지 헷갈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서점에 들어서면 주인장의 고심 끝에 선택된 수많은 책을 만날 수 있는, 분명 서점이다.



땡스북스의 상징 노란색 간판


<땡스북스>는 다른 동네서점보다 조금 규모가 큰 편이다. 규모만큼이나 서점 내에 책 진열 공간도 다채롭고, 자유롭게 책을 가져다 볼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도 놓여있다. 그리고 간단한 음료도 즐길 수 있다. 벽면 책장과 아일랜드형 진열대, 디스플레이형 진열장이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어 분야별로 책을 둘러보고 들추어 보기 쉽게 서점 공간이 구성되어 있다. 음료 판매대와 테이블은 보조출연자처럼 주인공인 책의 공간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었다. 책장과 진열대, 진열장은 각각 콘셉트와 주제에 따라 책과 소품, 디자인 제품이 놓여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나는 서점의 정중앙에서 조금 비켜난, 유리창 밖으로 길목을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보이는 지점에 멈춰 섰다. 파노라마 사진을 찍듯 몸을 360도로 천천히 돌리며 서점을 둘러보았다. 주인장과 점원을 제외하고 예닐곱 명이 제각기 자신의 자세로 자신의 책을 들고 자신의 세계에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저 사람들은 언제 저 세계에서 빠져나올까. 노란 불빛이 꺼져야 할까.’

서점 내 노란 조명 불빛이 그들의 세계를 지켜주듯 감싸 안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북 큐레이션 동네서점의 취향저격

<땡스북스>는 브랜딩, 소설·에세이, 미술·회화, 그래픽디자인, 잡지 등 각 분야에 따라 주목할 만한 책과 신뢰할 수 있는 출판사의 엄선된 책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책 구성을 들여다보다 매우 흥미로운 기분이 들었다. ‘디자인’을 시작으로 연결된 듯한 일정한 성향의 책 구성이었다.

책 읽기에 ‘맥락적 읽기’라는 게 있는데 꼭 독자들의 책 읽기까지 염두에 둔 구성처럼 보였다. 이는 홍대 앞이라는 특수한 장소 특성을 고려한 주인장의 전략적 구성일까. 아니면 그래픽 디자이너이기도 한 주인장의 취향이 반영된 것일까.

최근 시집이 인기가 있어서인지 시집이 별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통과의례처럼 모든 사람이 한 번씩 ‘문학동네시인선’의 시집을 들추고 지나갔다. 시집 속에서 걸어 나와 낙엽처럼 놓여있는 시구절에 눈길이 갔다. 이 책 저 책 바삐 오가며 시집을 들추다가, 얼마 전 케이블방송에서 소개되어 관심 받았던 박준 시인의 시집을 집어 들었다. 한참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유리창 밖이 완벽히 어둑해져 있었다.



벽에 걸린 시집과 다양한 분야의 책이 진열된 모습


벽에 색색의 표지와 정갈한 글귀가 액자처럼 걸려있는 시집들이 이름 모를 누군가의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한 권 한 권의 책으로서가 아니라, 스물여섯 권이 하나의 그림으로 벽면은 캔버스로 보였다. 그리고 그 캔버스 위에 봄이 애처롭게 머물러 있었다. 이문재 시인이 선물한 봄이었다.


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 있다.

밤새 봄비가 다녀가신 모양이다.

연한 초록

잠깐 당신을 생각했다.

- 《봄 편지》, 이문재 –


동네서점의 갤러리

서점 가장 안쪽에서 숨은 계단을 발견할 수 있다. 계단을 오르면 ‘더 갤러리’ 이다. 서점을 거치지 않고 건물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수도 있지만, 서점을 둘러보고 서점 안에 숨어있는 좁은 계단을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이 곳은 2011년부터 매년 열 개 이상의 기획 전시를 선보이고 있는 전시공간으로, 전시 외에도 작가와의 만남, 출판사와 협업 세미나, 이벤트 등이 열리고 있다. 나는 서점을 욕심껏 둘러보고 난 후, 계단을 올라갔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첫 번째 계단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예쁜 엽서와 책갈피가 내 발길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림책에 실린 원화로 만들어진 엽서와 책갈피였다. 갤러리는 생각보다 넓고 정갈했다. 반듯한 직사각형의 공간에 하얀 벽과 노란 조명이 조화를 이루어 소규모 갤러리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더 갤러리에서 내려다 본 땡스북스


안녕히가세요, <땡스북스>입니다

<땡스북스>의 영업 종료 시각은 오후 9시 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점을 둘러보며 마음에 담아 둔 책 중 무엇을 사야 할지. 책 진열장과 진열대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결국 아까 읽다 만 시집을 골랐다. 오늘은 평소 잘 사지 않는 시집을 두 권이나 산 특별한 날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또 놀러 오세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며 잔다리길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 목표라는 <땡스북스>. 앞으로도 오래 이 자리에서 변함없이 그들의 철학을 이어가길 기대해본다.



잠시 책을 볼 수 있는 노란 테이블과 노란 쿠션이 있는 의자





* 「여행자의 동네서점」은 해피빈 공감펀딩(2016.7.13~8.22)을 통해 모금 된 금액으로 책자와 전자책, 여행자의 동네서점 서울지도를 제작하였습니다. 어반폴리에 연재되는 내용은 「여행자의 동네서점」 책자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일부 동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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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 편집자: 박혜주

구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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