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RBAN INSIGHT SERIES - 덴마크의 도시재생

1. [INTRO] 행복도시로 거듭난 천년 고도 코펜하겐 上

NAKED DENMARK|

가족과 함께 살기 좋은 도시. 유능한 글로벌 인재가 모여드는 도시. 자전거를 타기 좋은 도시. 2025년까지 탄소 중립 도시가 되겠다고 선언한 곳. 차량보다 자전거가 많은 도시.

화려한 수식어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곳은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København)이다. 혹자는 한국인이 상상하는 유럽 도시의 전형이 코펜하겐이라고도 말한다. 동화작가 안데르센(H.C. Andersen) 작품 속 세세한 묘사가 곧 덴마크의 풍광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성과 교회, 키가 엇비슷한 벽돌 건물, 시내 곳곳의 너른 공원, 노상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즐기는 동네 주민 등 ‘유럽’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낭만적인 모습이 코펜하겐에서는 일상이다. 적어도 여름에는 말이다.


평일 낮 코펜하겐 시내 공원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시민들

ⓒ 안상욱


하지만 코펜하겐이 처음부터 낭만적인 도시였던 것은 아니다. 이곳은 1000년 동안 수많은 부침을 겪으면서 북유럽을 대표하는 도시로 거듭났다. 이번 편에서는 코펜하겐이 지금처럼 살기 좋은 도시가 된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도시의 역사를 되짚어 보려 한다.


코펜하겐 대표 관광지 뉘하운

ⓒ 안상욱


어촌이 수도가 되기까지

출토되는 유물을 보건대, 코펜하겐에는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해와 발트해 사이에 자리한 입지적 조건과 풍부한 청어 어획량 덕분에 10세기까지는 바이킹족이 모여 살며 어촌을 형성했다. 여담으로 코펜하겐이라는 이름은 덴마크어로 무역항(Merchant’s Harbor)이라는 뜻이다.

서기 958년, 현존하는 왕조 중 가장 오래된 덴마크 왕조의 시대가 열렸다. 당시만 해도 덴마크 왕조의 수도는 코펜하겐이 아닌 록 페스티벌로 유명한 로스킬데(Roskilde)였다. 코펜하겐이 바이킹 문명의 주요 거점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건 1167년, 압살론(Absalon) 주교가 오늘날 국회의사당으로 활용되는 크리스티안보르 궁전(Christianborg) 자리에 요새를 지은 시점이다.

살기 좋은 곳은 약탈할 것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코펜하겐은 언제나 외세의 위협에 시달렸는데,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던 독일 웬드족 해적과 노르웨이와 스웨덴 등이 호시탐탐 코펜하겐을 노렸다. 같은 맥락에서 1369년에는 한자 동맹이 압살론 주교가 세운 요새를 무너뜨렸다. 그 여파로 약 5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덴마크 사람들은 폐허 위에 코펜하겐 성을 재건할 수 있었다. 코펜하겐 성은 그 뒤로 수백 년간 수차례 증축되며 왕궁으로 활용됐으나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대처로 크리스티안 6세는 코펜하겐 성을 철거하고 새로운 성을 지으라고 명했으며 1731년부터 구 코펜하겐 성의 철거가 시작됐다.

1745년, 코펜하겐 성이 있던 슬로츠홀멘(Slotsholmen)에 로코코 양식의 크리스티안보르가 들어섰다. 슬로츠홀멘이라는 지명은 ‘성이 들어선 섬’이라는 뜻이다. 같은 자리에 지었지만, 크리스티안보르는 1794년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코펜하겐 성만큼 오래도록 왕궁으로서 위엄을 뽐내지는 못했다. 화재는 코펜하겐의 3분의1 가량을 집어삼켰고, 불 난 집을 떠난 덴마크 왕족은 네 귀족 가문이 별장으로 쓰던 건물을 사들여 거처로 삼았다. 이곳이 현재 덴마크 왕궁으로 활용되고 있는 아말리엔보르(Amalienborg)다. 불탄 크리스티안보르는 재건돼 상징적인 국가 행사를 진행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며 덴마크가 민주화된 1849년부터는 국회와 총리실, 대법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크리스티안보르

ⓒ 안상욱


요새 도시의 성벽이 열리다

어촌 마을이었던 코펜하겐이 덴마크 왕조의 어엿한 수도로 자리 잡은 사연을 따라 근대의 문턱까지 넘어왔다. 지금부터는 코펜하겐이 현대적인 면모를 갖춰온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앞서도 언급했듯이 상업적, 군사적 요충지인 코펜하겐의 면면에는 전쟁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크리스티안 4세는 17세기 초 대외적인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 코펜하겐을 요새 도시로 개발하는 기본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도시 북쪽 땅도 성벽 안으로 끌어안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덴마크가 경제적으로 궁핍했기에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1640년경 유틀란드 반도와 스칸디나비아반도 남쪽 스카니아를 타국에 빼앗기며 왕조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자 부랴부랴 요새화 계획이 재개됐다. 20년에 걸친 공사 끝에 코펜하겐을 둘러싼 성벽과 요새 12개, 그 주위를 둘러싼 해자가 완성됐다.


1728년 요새화된 코펜하겐을 그린 지도

위키미디어커먼즈 CC PD J.F. Arnoldt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리면서 코펜하겐 요새는 힘을 잃었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대한 영국 해군의 대응 과정에서 중립국인 덴마크가 잠재적인 위협요소로 간주한 게 발단이 되었다. 1807년 9월, 영국 해군이 압도적인 화력으로 덴마크를 공격했다. 코펜하겐을 둘러싸고 나흘 동안 이어진 포격으로 195명이 죽고 768명이 다쳤다. 결국 덴마크는 중립 선언을 철회하고 참전하였으나 함대를 잃은 해양 강국은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은 결국 덴마크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패전 이후 덴마크는 처참한 상황에 놓였다. 국고가 빈 마당에 무너진 요새를 재건하는 일은 사치였고, 1840년 크리스티안 8세는 국방위원회에 남은 요새의 군사 기능을 정지시킬 것을 명령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년 뒤에는 독일과의 접경 지역인 슐레스비히-홀스테인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슐레스비히 전쟁이 발발했다. 1848년부터 3년간 이어진 1차 슐레스비히 전쟁은 덴마크의 승리로 끝났으나, 2차 전쟁에서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제국이 승리했다. 이 전쟁을 치르며 코펜하겐은 잠시 도시 방어 시설을 확충하기도 했으나, 현대전에서 요새의 역할이 크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 뒤 성벽을 철거했다.

요새의 성벽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지금도 지명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북문(Nørreport), 서문(Vesterport), 남문(Østerport) 등지는 무장 병력이 상주하는 석조 성문이 있던 곳이며, 오늘날 산책로로 주목 받는 카스텔레트(Kastellet)는 원래 이름 그대로 성채(Citadel) 자리였다. 외레순 해협에서 코펜하겐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는 성 안나의 보루(Sankt Annæ Skanse)에는 별 모양 해자와 별나게 솟아오른 성벽 토대가 남아 있고, 지휘관이 살던 건물은 덴마크 국방참모총장 공관으로 활용 중이다.


1900년 코펜하겐 주변 성곽을 철거하는 모습

위키미디어커먼즈 CC PD Alb. Gnudtzmann & Helmer Lind


성벽은 밖으로는 침략자를 막지만 동시에 안에 사는 이들을 가두기도 한다. 인구를 가두던 둑이 사라지자 도시의 인구 지형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성벽이 해체되기 시작한 19세기 이후로 코펜하겐 인구는 요새가 건재하던 시기에 비해 4배가량 늘었다. 그 결과 1855년 코펜하겐은 오늘날 인도 뭄바이보다 2배나 높은 인구 밀도에 시달렸다. 다시 말해, 당시 코펜하겐은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요새화 도시가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성문이 열리자 능력 있는 시민은 너 나 할 것 없이 코펜하겐 밖으로 이주했다. 군사적 이유로 거주 시설을 지을 수 없던 성벽 주변에도 1852년부터 집이 들어섰다. 도시 방호시설이었던 인공 호수(Søerne)도 건물로 둘러싸였고, 외곽 지역인 뇌어브로(Nørrebro)와 베스터브로(Vesterbro), 프레데릭스베르(Frederiksberg) 지역까지 도심이 빠르게 팽창했다. 벽을 공식적으로 허물기 시작한 1868년부터는 요새와 성벽이 있던 자리 역시도 거주지로 활용됐다. 1900년대 초부터는 브론쇼이(Brønshøj)와 발뷔(Valby) 지역도 대규모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나치에 점령당하는 등 수모를 당하기도 했지만, 이후 덴마크는 다른 서방 국가와 마찬가지로 급격한 전후 성장기에 들어섰으며 코펜하겐 역시도 성장했다. 하지만 도심의 환경은 성장세와 달리 악화됐는데, 시 정부의 곳간이 텅 빈 탓에 도시 정비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탓이 컸다. 1970년대 매년 1만2천 명이 코펜하겐을 떠났고, 지금은 코펜하겐 시내(Copenhagen City)라고 불리는 원도심에 남은 사람은 도시 밖에 거주지를 구하지 못한 가난한 학생이나 노인, 히피뿐이었다. 결국, 코펜하겐은 살기 힘든 도시라는 인식이 공고해졌다.

그러나 덴마크의 수도이자 정치, 경제 중심지인 코펜하겐의 위상은 여전히 공고했으며 시 외곽으로 이주한 시민들은 여전히 코펜하겐으로 통근했다. 따라서 당시 코펜하겐의 화두는 시민의 주거지로 자리 잡은 교외 지역을 코펜하겐 도심과 연결하는 것이었다.


2편에서 계속


제작: 네이키드 덴마크

후원: 어반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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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 편집자: 강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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