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RBAN INSIGHT SERIES - 덴마크의 도시재생

6. [GROUP] 사람 살기 좋은 도시를 그리다, 겔(GEHL)

NAKED DENMARK|

덴마크 건축가 얀 겔(Jan Gehl)은 코펜하겐이 살기 좋은 도시로 거듭나는 데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본인이 주창한 철학의 시발점인 스트뢰에에 선 얀 겔

ⓒ Gehl 제공


모더니즘이 팽배한 전후 건축계에서 ‘사람이 먼저’라며 파란을 일으킨 그의 사상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당연한 상식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당대 지배적이었던 모더니즘 사상을 정면으로 반박한 그의 생각이 상식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숱한 고난이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사람을 위한 도시를 만든다(making cities for people)”는 슬로건을 반세기 넘게 실천해 온 도시계획 컨설팅 그룹 겔(Gehl)의 발자취를 되짚어 본다.


건축가와 심리학자의 사랑, 살기 좋은 도시를 낳다

컨설팅 그룹 겔을 이해하려면, 먼저 건축가 얀 겔의 생애를 쫓아야만 한다. 얀 겔의 건축 경력은 평범하게 시작한 편이다. 1960년 덴마크 왕립예술대학(KADK)에서 건축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얀 겔은 곧바로 모교 교단에 올랐고, 교수 생활 중 심리학도인 잉그리드 문트(Ingrid Mundt)를 만나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합은 자연스레 건축과 심리학이 경계를 넘어 뒤섞이는 계기가 됐다.

장식적인 요소를 모조리 걷어내고 기능에만 충실한 건물을 짓자는 기능주의(functionalism)를 내세운 모더니즘이 세계 건축계를 지배하던 시기, 얀 겔 역시도 원래는 여느 건축가처럼 사람보다는 자재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심리학자였던 배우자 잉그리드는 그런 모습을 마뜩잖아 했다. 그녀는 남편인 얀 겔에 이렇게 물었다.


“왜 건축가는 사람에 관심을 두지 않죠?”


얀 겔은 아내와 나눈 대화를 통해 시베리안 호랑이가 살기 좋은 환경은 잘 알면서,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에는 젬병인 건축가의 현실을 깨달았다. 1965년, 그는 인간이 어떤 환경에서 살기 좋은지를 연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연구 여행을 떠났다. 예나 지금이나 이탈리아는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로 명성이 자자하기 때문이다.


Our Story – Jan Gehl and Gehl Architects from Gehl – Making Cities for People on Vimeo.


이탈리아는 왜 살기 좋은가

겔 부부는 6개월간 이탈리아에서 모범 사례를 수집하고 관찰했다. 조사 방법론은 원초적이었다. 이들은 사람이 도시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도로에 오가는 사람과 차량을 일일이 셌다. 보행자가 특정 지점에서 출발하여 걷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 어떤 행동을 하는지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렇게 수집한 방대한 자료 속에서 부부는 특정한 행동 유형을 찾아냈다. 이때 겔 부부가 개발한 조사 방법론은 도시 내 시민의 행동 패턴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에서는 현재까지도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탈리아 연구 노트

ⓒ Gehl 제공


이탈리아에서 모범 사례를 조사하고 코펜하겐으로 돌아온 겔 부부는 곧바로 코펜하겐을 되살릴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전 연재를 통해 설명했듯이, 당시만 해도 코펜하겐은 살기 좋은 도시가 아니었다. 특히 주거 환경이 열악한 원도심은 공동화 문제에 시달렸다. 일련의 상황을 고려하여 겔 부부는 1962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보행자 전용 도로로 거듭난 스트뢰에(Strøget)가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코펜하겐 프로젝트, 최초의 도시 환경 이용자 행태 연구

얀 겔은 1968년 덴마크 왕립예술대학 건축학과 교수진 및 학생들과 함께 코펜하겐에서 도시 이용자 행태 조사에 착수했다. 여름부터 사계절의 아침과 밤, 주말과 주중을 모두 포괄한 장기 연구였으며, 도심 방문자의 행태를 주제로 이처럼 대규모의 체계적인 조사가 시행된 것은 관련 연구 사상 최초였다. 이때 손잡은 왕립예술대학 건축학과와 코펜하겐시는 이후로도 긴밀히 협업했다. 즉, 얀 겔의 연구를 계기로 코펜하겐 도시 개발 계획에 학계가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전통이 생겨난 것이다.

1971년에 얀 겔은 이탈리아와 덴마크 코펜하겐에 걸친 연구 결과를 정리한 책 <Life Between Buildings : Using Public Space>를 선보였다. 저서에서 얀 겔은 모더니즘 풍조 일변도인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교외 지구에 무분별하게 구조물이 들어서고 있으며, 정작 건물 사이에서 영위되는 인간의 삶은 백안시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건물 사이 도로를 주민이 일상을 영위하는 공공 부지로 보고 도시 계획을 입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반응은 싸늘했다. 보수적인 건축 업계에서는 얀 겔을 이단아 취급했으며, 그의 저서 역시도 16년이 지나서야 영어 번역본이 출간됐을 정도였다.


10개 국어로 번역 출간되어 현재는 인간 중심 도시 계획의 교과서로 여겨지는

<Life Between Buildings : Using Public Space>

ⓒ Gehl 제공


하지만 얀 겔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73년부터 1997년까지 꾸준히 교단에 올라 “삶을 위한 건축”을 역설하였고, 도시 이용자 행태 조사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인간 행위를 결정짓는 원리를 건축의 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그의 주된 주장이었다.


오슬로 프로젝트, 얀 겔 이론을 실제로 구현하다

학계에서는 외면받았지만, 코펜하겐시는 오히려 얀 겔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코펜하겐시는 도심 환경을 보행자, 자전거 친화적으로 개선하며 ‘부랑자나 사는 도시’라는 오명을 지워갔다. 이를 지켜보던 이웃 국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Oslo) 역시도 1987년 얀 겔에게 조사를 맡겼다. 처음으로 덴마크 밖에서 연구할 기회를 얻은 얀 겔은 오랜 기간 쌓아온 이론을 실제로 적용했다.

이후 덴마크 왕립예술대학 출신으로 얀 겔의 제자인 건축가 헬레 쇠홀트(Helle Søholt)는 40년 동안 은사가 쌓아온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컨설팅을 넘어 도시 환경 개선 사업에 실제로 뛰어들어 사람을 위한 도시를 구현하자고 제안했다. 뜻이 맞았던 두 사람은 2000년 겔 아키텍트(Gehl Architects)를 설립했다. 그동안 이용자 행태 조사와 도시 계획 컨설팅을 전담하던 팀은 겔 연구소(Gehl Institute)라는 조직으로 거듭나 출판, 워크숍 및 전문가 과정 개설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얀 겔의 이론을 실현하는데 뿌리 둔 두 조직은 유기적으로 협업해 오다 지금은 ‘겔’이라는 단일 조직으로 일하고 있다.


런던 프로젝트, 얀 겔 이론을 거대 도시에 접목하다

2003년 런던시 교통국과 도심 업무 환경 개선 비영리기구 센트럴 런던 파트너십(Central London Partnership)은 겔 아키텍트에게 런던 도심 환경에 대한 연구를 의뢰했다. 런던 같은 거대 도시(mega city) 환경을 조사한 적 없던 겔 아키텍트에게 이는 큰 도전이었고, 대규모 군집을 측정하고 조사하는 방법론을 개발해야 했다. 겔 아키텍트는 도시 전체를 샘플링하는 대신 전략적으로 연구 장소를 특정했다. 분석은 성공리에 진행되었고, 당시 런던 시장 켄 리빙스톤(Ken Livingstone)은 겔 아키텍트의 연구 결과를 <사람에게 좋은 도시를 향해 : Towards a fine City for People>이라는 보고서로 엮어낸 뒤 이를 재임 선거 캠페인에 요긴하게 활용했다.

비록 런던 연구가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런던의 도시 계획 관계자와 정치인이 런던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는 데는 성공했다. 당시 런던 시장 건축 및 도시화 자문단장이었던 리차드 로저스(Richard Rogers)는 이렇게 말했다.


“이 연구 덕분에 우리는 런던의 장점과 특성을 기반으로 훌륭한 장소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런던을 더욱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됐죠.”


런던 연구는 얀 겔의 사상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계기가 됐다. 런던이라는 세계적 대도시에서 거둔 성과를 지켜본 많은 국가에서 컨설팅을 의뢰했으며 그 과정에서 팀은 성장했다. 이에 힘입어 현재는 유럽을 넘어 미국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14개국 출신 70여 명이 함께 일한다.

런던에서 개발한 연구 방법은 뉴욕, 멕시코시티, 상파울로, 상하이 등 다른 거대 도시에서도 성공적으로 활용됐다. 10여 년 전부터는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삶의 질 개선을 추구하는 중산층이 크게 증가한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 겔을 찾는 경우가 많다.

겔의 성취는 고향인 덴마크에서도 이어졌다. 덴마크 정부는 2014년 ‘사람 제일’(Putting people first)이라는 전국 단위 건축 정책을 내놓았다. 건물을 구조물이 아닌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건축 환경으로 전제하고, 분야와 학계를 불문하고 협업한다는 것이 정책의 요지다.


2014년 덴마크 정부가 얀 겔 방법론에 기반하여 내놓은 ‘사람 제일’ 건축 정책

ⓒ Gehl 제공


도시를 시민 품으로

얀 겔 교수의 연구팀으로 출발한 겔은 어느덧 국제적인 도시 컨설팅 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사람을 위한 도시를 만든다”는 가치만큼은 한결 같다. 조감도와 대축척 지도를 보고 공간을 재단하던 모너니즘에 대항하여, 공간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눈높이와 감각을 척도로 삼아야 살기 좋은 도시(liveable cities)를 만들 수 있다는 얀 겔 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계승한 결과다.

언뜻 시민운동가의 구호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겔은 살기 좋은 도시 환경이 공간을 영위하는 사람뿐 아니라 부동산 사업자, 정책 당국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성과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얀 겔 인터뷰 ‘좋은 도시를 만드는 법’



제작: 네이키드 덴마크

후원: 어반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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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 편집자: 강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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