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RBAN INSIGHT SERIES - 영국의 도시재생

2. [PLACE] 재생과 개발 사이, 배터시 화력발전소

이다인|

PINK FLOYD <ANIMALS, 1977>


역사와 문화의 아이콘, 배터시 화력발전소

흑색 연기를 내뿜는 굴뚝과 거대한 몸체, 그리고 하늘에 떠 있는 한 마리의 돼지. 영국 록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애니멀스(Animals, 1977)] 앨범 커버 속 배터시 화력발전소(Battersea Power Station)의 모습이다. 2017년 12월 23일 오전 10시. 런던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템즈강 남부의 Sleafor Street에 도착한 직후 향한 곳은 인적 드문 회색 도시였다. 화려한 색감의 사이니지로 도배된 철벽 저 너머로 더 이상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4개의 굴뚝이 런던의 스카이라인 위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영국 애플 본사의 새 보금자리로 주목받는 배터시 화력발전소의 오늘이다.



개발 중인 배터시 화력발전소


NEVER ORDINARY, 굴뚝 부활하다

하루 전 다녀온 테이트 모던 갤러리와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현장은 둔탁한 공사장 소리만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15분 남짓 걸어 “POWER”라는 글자가 선명한 ART 공간에 도착했다. 발전소를 둘러싼 가벽에서 화력발전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오브제와 배터시 화력발전소 프로젝트에 대한 소개 글을 찾을 수 있었다. 런던의 대표 아이콘인 ‘Red Telephone Box’를 디자인한 ‘Sir Giles Gilbert Scott’이 설계하면서 건축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배터시 화력발전소는 1930년대 A동, 1950년대 B동이 건설되었다. 발전소가 힘차게 가동되던 시기, 런던 에너지 공급의 20%를 책임졌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항공산업의 요람, 20세기 런던의 엔진, 세계적 디자인 아이콘이라는 수식어로 묘사되었던 배터시 화력발전소는 에너지 산업의 무게추가 석유, 가스, 원자력으로 옮겨가는 추세에 밀려 1983년 폐쇄되었다. 폐쇄 이후 개발업자와 지역 커뮤니티 간 알력 속에서 발전소의 재사용에 대한 논의와 계획이 거듭 불발되며, 배터시 화력발전소는 30년 이상 부활하지 못한 채 과거 영국의 위상을 나타내는 유산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배터시 화력발전소 재생계획(배터시 화력발전소 공식 사이트)


배터시 화력발전소는 2011년 건축가 Rafael Vinoly가 제안한 마스터플랜이 승인되고, 2012년 말레이시아의 SP Setia사와 Sime Darby사의 컨소시엄에 의해 발전소 부지 매입이 진행되며 부활하기 시작했다. 마스터플랜에 따라 복원 중인 화력발전소를 중심으로 양쪽 측에 주거 구역이 조성되었고, 북쪽 측에는 강변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공공 도보 공간이 마련되었으며 남쪽 측에는 호텔, 오피스, 주거 구역이 추가로 조성되었다. 결과적으로 발전소 주변 지역 전체가 예술 상업, 쇼핑, 거주 기능이 결합된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중심부에는 언더그라운드(지하철)가 생기면서 발전소는 접근성을 확보하게 되고, 발전소의 전체 경관을 그대로 살리면서 배터시 공원 보행로를 포함한 주변지역과 연계될 수 있도록 구획할 예정이다.

새롭게 태어날 발전소 내부는 두 개의 터빈실과 중앙부 대규모 공간, 6개의 층으로 구성된다. 특히 발전소 특유의 거대한 규모가 인상적인 터빈실은 테이트모던 갤러리와 같이 재건될 예정이고, 중심부 공간은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컨퍼런스 센터로 탈바꿈하여 다양한 행사를 유치할 예정이다. 발전소 내부 제일 위 층은 자연광을 활용한 화려한 오피스 공간으로 바뀐다. 더 놀라운 건 새로운 공간활용에 그치지 않고 발전소 본연의 역할에도 충실하도록 공간을 재생할 에정이란 사실이다. 향후 배터시 화력발전소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소로서 본래의 기능을 회복할 예정이다.


배터시 화력발전소 재생계획(배터시 화력발전소 공식사이트)


2020년 지역 주민의 품으로 돌아올 발전소는 현재 굴뚝 4개가 재건되었고, 마스터플랜 1단계인 ‘Circus West Village’가 완성된 상태이다. 템즈 강변을 따라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 입주자들과 지역주민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과 상점이 운영되고, ART SPACE에서는 주기적으로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팝업샵과 워크숍을 운영한다. 이는 개발 지역에 소소한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아직은 불완전한 상태로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듯한 발전소의 굴뚝을 바라보며, 2021년 애플 본사가 입주한 뒤로는 지역과 발전소가 어떻게 소통하게 될지 상상해보았다.


배터시 화력발전소 커뮤니티 그룹 캠페인 포스터 (출처: 그룹원 BRIAN BARNES 트위터)


SELLING AN ICON, 재생의 가면을 쓴 재개발인가

NEVER ORDINARY. 배터시 화력 발전소 재생 프로젝트는 “평범하지 않다”라는 슬로건을 통해 발전소의 부활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반면, 발전소가 폐쇄된 이후에도 그 가치를 알리고, 지속적인 보전 활동을 해온 배터시 지역 커뮤니티 (Battersea Power Station Community Group)와 세계문화재펀드 (World Monument Fund)는 ‘SELLING AN ICON’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배터시 화력발전소 재생 프로젝트의 이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재생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배터시 지역 커뮤니티와 개발사 간의 간극은 지역 재생의 의미와 방향성에 대한 지속적인 소통과 합의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이 간극 사이에서 주민 커뮤니티와 개발사, 보전과 개발 사이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고 있는 잉글리시 헤리티지(English Heritage)는 무분별한 개발을 방지하기 위한 3가지 핵심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공공접근성(Public Access) 원칙은 개발 과정이 화력발전소의 본래 경관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둘째, 적절한 보전(Appropriate Preservation) 원칙은 발전소의 정체성과 같은 벽돌(Brick), 네 개의 굴뚝, 그리고 발전소 내부 환경을 보호하려는 원칙이다.”

“셋째, 투명성(Transparency) 원칙은 재생 프로젝트의 투명한 의사결정 과정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터시 지역 커뮤니티에서는 의문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빅토리아 역에서 기차를 타고 지나가면 신축된 아파트에 가려져 더이상 발전소 굴뚝의 인상적인 경관을 감상할 수 없다. 새롭게 보수된 굴뚝은 본래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을 뿐, 발전소 내부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상점과 오피스로 채워져 본연의 정체성을 잃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공공의 유산을 재생하기 위한 의사 결정 과정은 “누구를 위한 변화인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채 꽉 막힌 굴뚝처럼 멈춰있다.

SAVE THE CHIMNEYS. 배터시 지역 커뮤니티의 바람처럼 배터시 화력발전소는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영국의 아이콘으로 부활해 지역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아니면 불안한 갈등만을 남기게 될까? 오래된 굴뚝에서는 이미 보이지 않는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URBAN INSIGHT SERIES - 영국의 도시재생' 연재글 리스트

1. [INTRO] KEEP CALM AND INNOVATE THE CITY
2. [PLACE] 재생과 개발 사이, 배터시 화력발전소 (현재글)
3. [PLACE] 미래도시를 설계하다, 킹스크로스
4. [PLACE] 지역 커뮤니티와 도시재생, 버로우마켓
5. [GROUP] 도시를 재정의하다, 어셈블(ASSEMBLE)
6. [OUTRO] 잘 생겼다 한국?! 도시재생 뉴딜 로드맵 


에디터

* 편집자: 강필호

이다인

도시가 살아가는 모습을 포착하는 기획자